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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2024.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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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10절 ~ 15절 [개역개정]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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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 여러 날 동안 바울의 일행을 따라다니며 소란을 피우자 참다못한 바울은 그 귀신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여 그녀에게서 나오도록 했습니다(행 16:18). 이 일로 바울 일행은 고소를 당합니다. 그 여종의 주인들이 이상한 풍속을 전하여 도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바울 일행을 고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여종은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에게 아주 많은 돈을 벌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자신들의 돈벌이가 끊어진 것에 화가 난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원들에게로 끌고 간 것입니다.

관원들은 바울과 실라를 심하게 때린 후 옥에 가두고 간수로 하여금 단단히 지키도록 명했습니다. 이에 바울과 실라는 발에 차꼬가 채워진 채 감옥 깊숙한 곳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몸은 채찍에 맞아 아팠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불평보다 기도와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과 실라는 주를 위하여 고난 받는 걸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행 5:41).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찬송할 때 다른 죄수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서 그런 모습을 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감옥에 있으면서 자기가 믿는 신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원망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기도는 몰라도 찬양은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요 8:41) 정작 삶은 마귀의 자녀로 살았던 것입니다(요 8:44). 더욱이 그들의 조상은 원망과 불평이 일상이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고난 속의 기도는 있을지 몰라도 찬양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속에서도 기도를 넘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롬 8:18).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실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고난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더니 감옥 문들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사슬들이 모두 풀려난 것입니다. 잠을 자던 간수가 깨어나 옥문들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죄수를 놓친 간수는 죄수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이 큰 소리로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일들을 보고서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간수는 점치는 귀신 들린 여자가 바울 일행을 쫓아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 16:17)고 한 말을 직접 들었거나 아니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간수는 바울 일행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이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구원 얻을 유일한 길이요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외에 죄인이 구원 얻을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 밖에는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그런데 역사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신바 바 있는데(마 24:5)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마 24:4).

그날 바울과 실라는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간수는 바울 일행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 모든 가정에도 이러한 기쁨이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날이 밝자 바울 일행은 석방되었습니다. 그들은 곧장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는데, 바울은 늘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그 성경은 물론 구약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구약을 통해 설명하고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이 전하고 있는 예수라고 말했습니다(행 17:3). 바울의 설교를 듣고 몇몇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고, 또 경건한 헬라인들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미워했고 급기야는 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것을 시기하고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에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갔습니다.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행 17:11a). ‘너그럽다’로 번역된 헬라어(εὐγένης)는 ‘출신이 좋은’(고전 1:26) 혹은 ‘고귀한’(눅 19:12)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교양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신념이나 삶의 방식만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 되는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그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이란 ‘큰 열심’ 혹은 ‘온전히 준비된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열심히 그리고 준비된 마음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던 복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던 복음과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나 데살로니가 사람들이나 모두 똑같은 복음, 똑같은 설교를 들었습니다(행 17:2, 11). 하지만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극렬하게 거부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그와 달리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길가처럼 굳어져서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들어도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그러니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마 13:19) 오히려 복음을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과 달리 베뢰아 사람들의 마음은 옥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 13:23).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전한 것을 무조건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행 17:11b). ‘상고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ἀνακρίνω)는 ‘체를 쳐서 골라내다’, ‘자세히 조사하다’라는 뜻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는 걸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인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찾아가며 자세히 살펴본 것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모든 성경을 다 보려면 회당에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기 위해 날마다 회당에 모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베뢰아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도 열정은 있었습니다. 그 열정은 진리를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려는 그릇된 열심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바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기 위해 베뢰아까지 쫓아온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17:13). 그들은 회심 이전의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열정이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허공을 치거나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무의미하거나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신앙의 대상이 있고, 목적이 있으며,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맹목적이거나 무의미한 신앙이 아니라 확고한 신앙을 가지기 위해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거나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특히 이단 사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그 뜻대로 살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딤후 3:16, 17). 우리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너그러운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성결한 예음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