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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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장 1절 ~ 3절 [개역개정]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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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재림까지 모두 예언되어 있고 재림을 제외한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눅 24:27).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자라신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었고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이는 모두 성경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미 5:2 ; 마 2:23 ; 4:14).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라신 곳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서 선지자 이사야의 책을 건네받아 이렇게 쓰인 곳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눅 4:21).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가 바로 자신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마쉬아흐)란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동사(마솨흐)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요 1:41 ; 4:25). 메시아는 어떤 특별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출 28:41)과 왕(삿 9:8)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가 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 이후에는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삼하 7:12, 13 ; 사 11:1, 10 ; 렘 23:5 etc.)에 따라 메시아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날 것이라 믿고 있었고(마 22:42), 그래서 메시아를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마 20:30 ; 요 7:42).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 직분 곧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의 직분을 모두 가지고 계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히 3:1). 대제사장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 혹은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중보자란 헬라어로 메시테스(μεσίτης)라고 하는데, 분쟁이 있는 당사자 사이에 합의 혹은 화해를 이끌어 관계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히 9:15)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삼아(롬 3:25) 죄로 인해 원수 관계에 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롬 5:10). 이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살 길이 열렸고(히 10:20), 누구든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5:11).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습니다(딤전 2:5).
또한 예수님은 선지자이십니다(눅 24:19).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자신과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했는데(신 18:15),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요 6:14).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대변자(출 4:16)로 선견자(삼상 9:9) 혹은 예언자(렘 28:9)로 불리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하실 일을 선지자들에게 알리셨는데(암 3:7), 이러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셨습니다(렘 1:5 ; 고전 12:2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느 선지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 자체였습니다(요 1:1).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사 40:8 ; 히 1:2 ; 벧전 1:25).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1 ; 빌 2:6). 그리고 그 말씀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영생의 말씀입니다(요 6:68). 누구든지 그 말씀을 믿으면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 3:16).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그와 그의 자손이 영원토록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삼하 7:13,16), 다윗의 나라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계 17:14)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통치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유대인의 왕으로서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다윗 시대에 누렸던 영화를 재현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요 1:49).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 특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요 6: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한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세상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평화의 왕이요(사 9:6)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두 시간에 걸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헬, 프토코스)’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기 힘든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경제적인 가난이 아닌 심령 곧 영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몹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가 채 되지 않았고 필리핀보다도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소위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보릿고개’란 전년에 거둔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봄이 되어 먹을 것이 없어서 덜 익은 보리를 추수하여 죽 등으로 만들어 겨우 입에 풀칠만 하던 시절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시절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황금찬 시인이 지은 ‘보릿고개 밑에서’란 시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덜 익은 보리나 새로 돋아 나오는 나물을 뜯어다가 죽을 끓여 먹었습니다. 이때 어린이들은 잘 먹지 못해서 몸이 부어오르고 누렇게 되는 병 즉 부황에 걸리기도 했고, 심하면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릿고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기였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보릿고개를 에베레스트산(해발 8,848미터)보다 더 높은 운명의 해발 9,000미터라고 했겠습니까. 이 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먹고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그를 따랐던 사람들도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주된 관심사 역시 ‘먹고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경제적인 가난이 아닌 영적인 가난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경제적인 가난에 대하여 무관심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는 자들 곧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6:31). 하늘을 나는 새들은 자기가 먹을 것을 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거두는 일도 없고 창고에 쌓아두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르시기 때문입니다(마 6:26). 또 참새는 값싸게 팔릴 정도로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존재입니다(마 10:31).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먹고사는 문제로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모르실 리 없습니다(6:32). 그럼에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마 6:33). 먹고사는 육신의 문제도 중요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것에 갈급하듯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갈급한 심령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심령을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사슴’에 비유했습니다(시 42:1). 지독한 가뭄으로 인하여 물을 먹지 못해 헐떡이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으려고 울부짖으며 찾음같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눅 4:18). 이 복음은 그들의 영적인 갈증을 해결해 줄 신령한 음료요(고전 10:4) 생명수 샘물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값없이 이 생명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계 22: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대부분 영적인 갈증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늘 부족한 거 같고 그래서 그 무언가를 얻으려고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갈증이 난다고 해서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갈증은 더해지고 결국에는 목이 타서 죽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그와 같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이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로 영적인 갈증을 채우려 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은 그가 누구든지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