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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2024.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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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16절 ~ 34절 [개역개정]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설교문 보기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까지 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에 베뢰아에 있는 신자들이 바울을 바닷가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상대적으로 바울보다는 위험이 적다고 판단해서 그곳에 조금 더 남아 교회를 보살폈던 것 같습니다.

베뢰아를 떠난 바울은 아덴이란 곳에 도착했습니다. 아덴은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말합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Αθην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그만큼 아덴은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세워진 신상만 3만 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신의 숫자가 가장 많은 종교는 힌두교입니다. 힌두교는 인도에서 발행했는데, 인도는 인구수에서도 세계 1위입니다. 2023년 5월 기준으로 14억 2,862만 명입니다(나무위키). 그동안 줄곧 중국이 1위를 차지했는데, 작년부터 그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섬기는 신의 수는 그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바울 당시 아덴이 그런 도시였습니다. 인구수보다 신상의 수가 더 많았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의 제단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행 17:23).

바울은 그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행 17:16). 그래서 회당에서는 유대교인들과 그리고 광장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행 17:17). 그중에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행 17:18a). 철학이란 헬라어로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라고 하는데, 이는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철학을 율법처럼 세상의 초등 학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골 2:8). 이는 철학이 복음과는 서로 반대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학파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의 입장을 취했고, 스토아학파는 힌두교처럼 모든 만물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바울을 가리켜 말쟁이라며 깔봤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바울은 아무 가치도 없는 지식을 마치 대단한 것인 양 떠벌리는 수다쟁이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이방 신들을 전하는 자라고 여겼습니다. 당시 아덴에는 수많은 신들이 숭배되고 있었고 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신들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와 부활을 전했는데(행 17:18), 그들은 예수를 이방 신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라고 하지 않고 ‘신들’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부활을 몸의 부활이 아닌 부활의 여신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 같습니다. 부활은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라고 하는데, 이 단어가 여성형(여자 이름)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는 아도니스(Ἄδωνις)라고 하는 부활의 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이 예수라고 하는 신과 부활이라고 하는 여신을 전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진리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행 17:21).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그를 데려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아레스의 (바위)언덕’이라는 뜻으로 아레스(Άρης)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입니다. 이곳에서는 재판이나 회의가 열렸고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곳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광장 가운데 서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22) 종교심이란 신을 갈망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을 말하는데,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까지 만들 정도로 매우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신들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바울보다 훨씬 이전 시대에 역병이 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도 우상들이 많았으나 역병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빠트린 신의 노여움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단을 쌓았는데 즉시 역병이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그 제단이 바울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만든 건 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 아니라, 물론 경외심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빠트린 신들로 인해 도시가 저주받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 신과 하나님을 연관시켜 설명했습니다. 그 신은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들 안에 살지 않으시고(행 17:24), 또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거나 받으실 필요도 없습니다(행 17:25a). 이방인들은 자신이 섬기는 신들이 거주할 집과 그들이 먹을 음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한 게 있어서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비롯한 모든 걸 주시는 분이십니다(행 17:25b). 또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곧 아담에게서 모든 민족을 만들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한 혈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덴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아주 특별하게 지음을 받은 민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유대인들과 매우 닮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르며 멸시했고, 헬라인들은 그들을 문화 수준이 낮은 야만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민족은 하나의 혈통 곧 하나님께서 지으신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살아갈 시간과 거주할 공간을 미리 정해주셨습니다(신 32:8). 에피쿠로스학파는 모든 일이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행 17:27). '더듬어 찾다'라는 말은 시각 장애인이 이리저리 손으로 만져 보며 무엇인가 열심히 찾는 걸 나타냅니다. 아덴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든 면에서 뛰어난 민족이라 여기고 그것을 자랑했으나 실은 어둠의 상태에 놓여있는 영적 시각 장애인들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다면 그분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행 17:27).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존재로서 그분을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 시인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그의 소생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행 17:28).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창 1:26, 27).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람의 생각이나 기술로 금이나 은이나 돌에 새겨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행 17:29). 그런 우상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을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의 형상으로 바꾼 것이고(롬 1:23),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롬 1:25).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는 시대에는 그런 행위를 내버려 두셨으나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행 17:3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해 놓으신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행 17:31).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듣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사후에도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간다고 믿었으나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헬라인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아예 영혼이 몸과 함께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 중에도 그런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과 영을 믿지 않았습니다(막 12:18 ; 눅 20:27 ; 행 23:8).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리를 뜨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레오바고의 재판관인 디오누시오를 비롯해 몇 사람이 바울을 따르고 믿었습니다(행 17:34). 비록 몇 사람이었다고 해도 바울의 수고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 한 영혼이 모두 귀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에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때가 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입니다(롬 2:6). 각 사람은 자신이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든지 아니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6:27 ; 롬 2:6-8).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마 25:46 ; 요 5:29).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 딤전 2:4).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르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셨고(요 3:16)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죄를 대속하도록 하셨습니다(갈 1:4). 그리고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늦지 않도록 회개하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벧후 3:15). 회개의 기회를 주심에도 계속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살후 1:9).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지만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며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