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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2025.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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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3장 10절 ~ 17절 [개역개정]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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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가리켜 인디언이라 부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친구란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자가 바로 진정한 친구라는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와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를 본 순간 너무나 마음이 아파 소리 높여 울며 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재를 날렸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욥의 몰골이 흉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일주일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며 아픔을 나누었습니다(욥 2:11-13). 여기까지만 보면 그들은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무죄함을 호소하자 이에 친구들이 반박하면서 둘의 관계는 원수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가 당하는 고통이 죄의 결과이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알려 주시라고 애원하기도 했습니다(욥 13:23). 혹시 젊었을 때 지은 죄 때문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욥 13:26). 하나님께서는 욥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도리어 친구들의 비난만 거세졌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마치 그를 괴롭히려 온 자들 같았습니다(욥 16:2). 욥은 그들을 보며 씁쓸함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주에 가까운 말을 쏟아냈습니다. “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욥 17:5) 욥은 자신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벌이 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홧김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욥은 친구들에게 몹시 화가 났습니다(욥 17:8).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욥에 대한 친구들의 비난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마치 치킨 게임(Chicken Game)을 보는 듯합니다. 치킨은 닭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겁쟁이를 가리키는 은어입니다. 두 사람이 각각 차를 타고 도로 양쪽 끝에서 서로를 향해 달립니다. 그 상태로 충돌하면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느 한쪽이 겁이 나서 충돌 직전에 피하면 둘 다 살겠지만, 피한 사람은 패자가 되고 겁쟁이로 낙인찍힙니다. 이 게임은 195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하는데, 한 마디로 자존심 싸움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공방이 그래 보였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욥을 불의한 자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 치부하면서(욥 18:21) 그런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욥 18:5-20). ‘불의’란 법에 어긋나거나[불법] 올바르지 않은 것[부정]을 말하는데, 성경은 이를 죄라고 했습니다(요일 5:17). 모든 불의가 죄라는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고전 6:9). 그들이 받을 것은 심판이고(살후 2:12)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또 바울은 세상 사람들을 불의한 자에 비유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전 6:1) 여기서 불의한 자들이란 이방인들 곧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불의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욥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의하고 악한 자이며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과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이 오히려 자기를 비난하는 것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욥 19:2). 그래서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너희마저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욥 19:21, 22) 욥의 하소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은 계속 욥을 비방했습니다. 이번에는 나아마 사람 소발이 나섰습니다.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욥 20:5-7) 찬송가 148장에 보면 ‘세상 부귀 모든 영화 분토만도 못하도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분토는 썩은 흙을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주로 똥이나 거름을 일컫는 표현입니다(왕상 14:10 ; 사 5:25; 렘 9:22; 습 1:17). 따라서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는 말은 분토처럼 영원히 사라질 거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악인이 잠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는 있으나 결국은 분토같이 영원히 망하게 된다는 것으로(욥 20:29), 욥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즉 욥은 고난 받기 전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소발은 그것을 일시적인 악인의 번영으로 본 것입니다.

이러한 소발의 견해는 잘못되었습니다. 분명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악인이라고 해서 가난하게 살거나 일찍 죽는 것도 아니고(욥 21:30), 의인이라고 해서 부자로 살거나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악인이 형통할 수 있고(잠 24:1) 의인이 고난 받을 수도 있습니다(전 7:15). 욥은 이에 대해서 “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라며 반문합니다(욥 21:17). 실제로 그런 일이 얼마나 일어났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욥의 친구들은 고난이 죄의 결과라는 편협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욥을 정죄했습니다. 심지어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욥이 짓지도 않은 죄들을 열거하며(욥 22:6-9) 그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욥 22:10). 그리고 더 이상 악인의 전철을 밟지 말고 그 길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회복될 것이고(욥 22:23)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며(욥 2:27) 하는 일마다 잘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욥 22:23). 엘리바스의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으나 욥의 상황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욥에게는 무익한 충고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상황이나 때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골 4:6). 이는 말을 할 때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과 같이 적절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으면 짜서 먹을 수가 없고 소금을 너무 적게 넣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가 없는 것처럼 말도 상황에 맞게 적절히 그리고 은혜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로의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고, 진심 어린 충고가 도리어 비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할 때는 ‘세 번 생각하고 한번 말하라’는 삼사일언(三思一言)의 고사성어처럼 신중히 생각한 후에 해야 합니다.

엘리바스의 말을 들은 욥은 그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혼잣말을 했습니다.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욥 23:2) 욥은 자신이 받는 재앙이 너무 심해서 탄식조차 나오지 않는다며 불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결백함을 밝히고 싶었습니다(욥 23:4).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실 거라 여겼습니다(욥 23:7).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만나 뵐 수도 없었습니다(욥 23:8, 9). 그로 인해 욥은 탄식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시고 자신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단련’이란 말은 ‘시험’을 의미합니다(욥 34:36; 시 66:10).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주는 시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을 알아보기 위해 주시는 시험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거의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둘의 목적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신앙의 연단을 위한 것이지만 사탄이 주는 시험은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게 그 목적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죄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연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연단이 끝나면 그는 용광로 속에서 제련의 과정을 거쳐 나오는 순금처럼 자신의 의로움이 드러나고 더욱 존귀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길을 걸어왔으며(욥 2:11), 그분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그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욥 23:12). 이는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바 있습니다(욥 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광에서 갓 캐낸 금에는 여러 가지 불순물들이 섞여 있습니다. 이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용광로 속에서 정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면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되고 다른 금속이 섞이지 아니한 순금이 됩니다. 단단한 그릇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약을 바른 질그릇을 뜨거운 불가마에서 오랜 시간 구워야 어떤 물질도 거뜬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옛 습관이나 의심, 걱정, 교만 등 믿음을 방해하는 불순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울러 질그릇처럼 깨지기도 쉽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불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바로 시련입니다. 시련은 신앙의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믿음을 단련시키는 용광로와 불가마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엡 4:13). 우리 모두 믿음의 시련을 잘 참고 견디어 아무것에도 부족함이 없고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