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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네 영혼이 잘됨같이

2025. 1. 13.
성경본문 보기

요한삼서 1장 1절 ~ 8절  [개역개정]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설교문 보기

2025년은 을사년, 푸른 뱀띠의 해라고 합니다. 옛사람들은 태어난 아이의 성격이나 운명이 그해의 띠에 해당하는 동물과 연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물이 그해에 태어난 아이를 지켜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동물들을 가리켜 십이지신(十二支神) 즉 땅을 지키는 열두 수호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띠나 동물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는 건 십이지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신 32:39 ; 삼상 2:6-8 ; 대상 29:12). 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 같은 땅에서, 황무지 같은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눈동자같이 지켜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신 32:10). 그 하나님께서 광야 같은 우리 인생길을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올 한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본문의 말씀처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소원합니다.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가이오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먼저 바울의 동역자로 에베소에서 고난을 함께 한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가 있습니다(행 19:29). 또 바울의 마지막 선교 여행 때 그리스에서부터 드로아까지 동행했던 더베 사람 가이오가 있습니다(행 20:4). 그리고 바울이 세례를 준 고린도 출신의 가이오가 있는데(고전 1:14) 바울은 그를 가리켜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라고 했습니다(롬 16:23). 이는 가이오가 자기 집을 교회의 처소로 제공하여 바울을 비롯해 그리스도인들을 대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이 가이오는 요한에 의해 버가모 교회의 첫 감독으로 임명받았다고 합니다(The Apostolical Constitutions, Book II, Chapter XLVI). 그래서 고린도 출신의 가이오를 본서의 수신자로 보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를 가리켜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요삼 1:1). 여기서 ‘참으로’는 헬라어 ‘엔 알레데이아(ἐν ἀλήθεια)’를 번역한 것으로, 문자적으로는 ‘진리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요한이 가이오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요한이 가이오를 사랑한 이유는 그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요삼 1:3). 요한에게 있어서 그의 자녀들 곧 요한이 부모의 관심과 사랑으로 양육했던 자들(요일 2:1)이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습니다.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 일이 무엇인가 대해서는 5절과 6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이란 당시의 순회 전도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방인들에게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요삼 1:7). 이방 신을 섬기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리도 없겠지만 설사 도와준다 해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도움을 받는다면 그들은 복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빌미로 어떤 대가를 바란다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순회 전도자들이 돈을 가지고 다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마 10:8) 숙식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여 숙식을 제공해 주어야 할 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롬 12:13 ; 딤전 3:2 ; 5:10). 여기에는 그들이 다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경비를 지원해 주는 일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를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요삼 1:8).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해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도움으로써 주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속한 교회에 순회 전도자들을 보내면서 그들 편에 한 통의 편지를 써서 부쳤습니다(요삼 1:9a). 그 내용은 아마도 순회 전도자들을 잘 대접해 줄 것과 그들의 경비를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가이오는 요한이 보낸 순회 전도자들을 정성껏 대접했으며,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후에 이들이 요한에게 그 사실을 전해주었고(요삼 1:3, 6), 이에 요한은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요삼 1:4). 그런데 가이오와는 달리 그 교회에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은 순회 전도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들까지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심지어 그런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요삼 1:9b). 그는 사도 요한이 교회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그가 보낸 순회 전도자들이 올 경우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순회 전도자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0:27).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려 하고 또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백성 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마 23:11).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디오드레베는 교만하여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첫째가 되고자 했고 크게 되려고 했습니다.

그는 순회 전도자들을 대접한 가이오를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일을 한 가이오가 도리어 교회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자신이 직접 교회를 방문하여 디오드레베가 행한 일에 대해 엄하게 책망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울러 가이오에게 그와 같은 악한 일을 본받지 말고 선한 일을 본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그동안 해왔던 선한 일에 더욱 힘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일이며(요삼 1:6),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요삼 1:11).

사도 요한은 이렇게 진리 안에서(요삼 1:3) 신실하게(요삼 1:5) 행하는 가이오가 잘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잘됨같이’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다’ 혹은 ‘형통하다’라는 뜻으로, 가이오가 영적인 활동을 잘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처럼 범사도 곧 모든 일에도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영적인 일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그가 하는 모든 일도 잘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은 가이오가 건강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라서 일 수도 있습니다. 몸이 건강해야만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몸이 건강할 때 주의 일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그만큼 제약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이 잘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얻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마 8:22),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영적인 생명을 얻으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엡 2:5). 그런 자들만이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가이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진리 안에서 행함으로 영적으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요한은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형통함과 강건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이는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을 축복해 준 내용과 그 의미가 상통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 27:28) 하늘의 이슬은 영적인 복을, 땅의 기름짐은 육신의 형통함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해서 많은 양의 이슬이 내리는데, 물이 부족한 이 지역에서 이슬은 식물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이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졌습니다(신 33:28). 또 땅의 기름짐은 토지가 비옥한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소산물의 풍성함을, 나아가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늘의 이슬이 없다면 땅이 아무리 기름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인 복이 없다면 육신의 형통함과 건강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건해도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시 90:10).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든지 아니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6:27 ; 롬 2:6-8).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마 25:46 ; 요 5:29).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2025년 한 해는 우리 교회 모든 권속이 가이오처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영육 간에 강건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