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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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5장 1절 ~ 6절 [개역개정]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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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친구들은 그를 죄인으로 규정했고, 욥은 자신을 의인으로 여겼습니다(욥 32:1). 둘은 마치 평행선을 달리듯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논쟁을 벌이다 빌닷의 마지막 말과 이에 대한 욥의 변론으로 끝을 맺습니다.
빌닷은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욥에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고 하겠으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어떻게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합니다(욥 25:4). 데만 사람 엘리바스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고 하겠으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고 하겠느냐?”(욥 4:17) 옳은 말입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 3:10). 자신을 의인이라 여기든 그렇지 않든 모두가 죄인입니다. 다윗은 죄를 범한 후 자기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고, 어머니가 죄 중에서 자신을 잉태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시 51:5).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어머니가 자기를 잉태한 순간부터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욥 9:2, 20). 그럼에도 자신을 의롭다고 한 것은 그가 받는 고난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로 그런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받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죄 때문은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욥 16:17).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로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욥 1:8). 욥 자신도 그런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습니다(욥 12:4).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그로 인해 하나님께 어떤 복을 받았는지 회상하는 장면이 29장에 나옵니다. 욥은 우유로 발을 씻으며 바위에서 기름이 시내처럼 흘러내렸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욥 1:3 ; 29:6). 또한 젊은이들이 그를 보면 자리를 피했고, 노인들은 일어서서 경의를 표했으며, 지도자들은 그의 말을 경청할 정도로 욥은 사회적으로 신분과 지위가 높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이는 단지 욥이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덕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 고아, 과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또 정의를 실천하며,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했습니다(욥 29:14-17). 이처럼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욥 1:1, 8).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부와 명예를 누릴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후에 교만하여 신앙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을 때 오히려 신앙에서 퇴보했습니다(왕상 11:9). 그는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말씀(신 17:17)을 따르지 않았고(왕상 11:3),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습니다(왕상 11:10). 웃시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강성해지고 명성을 떨치게 되자(대하 26:25) 그의 마음이 교만해져 악을 행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대하 26:16).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았지만(왕하 20:7)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해져서(대하 32:25) 자신의 부와 영광을 자랑했습니다(왕하 20:13). 이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후에 교만하여 신앙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부와 명성을 떨쳤지만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곧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공의와 정의를 행했습니다(마 23:23). 그뿐 아니라 욥은 환란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욥 1:20-22). 비록 고난이 계속되는 동안에 친구들과 변론을 하면서 때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긴 했으나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욥 2:9) 했지만, 욥은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욥 2:10). 하나님을 향한 욥의 신앙은 복을 받을 때나 환란을 당할 때나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옹지마란 ‘변방(塞)에 사는 늙은이(翁)의 말(馬)’이란 뜻입니다. 옛날 중국 북쪽 변방에 한 늙은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기르는 말이 집을 나가 국경 너머로 가버렸습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위로하고 동정하자 그는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는지 알겠소.’ 하면서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 후 국경을 넘어갔던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그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또 무슨 화가 될는지 알겠소.' 하며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달리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 그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하며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전쟁이 나자 많은 젊은이가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부러진 다리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않았고 그래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일은 새옹지마와 같습니다. 언제든 우리의 상황이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아 부와 명예를 누리다가도 환란을 당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반대로 환란에서 벗어나 부귀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상시에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어려움이 찾아오면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에는 신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어려울 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서도 안 되고 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신앙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이 지혜이며 악을 떠나는 것이 명철이라고 했습니다(욥 28:28).
욥은 자기가 한 말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욥 2:3). 그런 그에게 환란이 닥치자, 친구들은 그 원인을 죄에서 찾았습니다. 욥이 죄를 지었기에 환란을 당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욥을 불의한 자요(욥 18:21) 악인으로 치부하면서( 20:29), 그가 살아온 삶까지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욥 22:4)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심판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욥 22:4).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습니다. 욥이 받는 고난은 심판도 아니고 징계도 아니며 연단을 위한 시험입니다(벧전 1:6, 7). 그럼에도 고난이 곧 심판이요 징계라고 생각한 친구들은 분명 욥이 큰 죄를 범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욥 22:5). 특히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욥이 지었을 법한 죄들을 열거했는데, 그가 살아왔던 삶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바스는 욥이 ‘과부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들을 학대했다’라고 했지만(욥 22:9), 욥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욥 29:12, 13). 그런 삶을 삶았기에 욥은 자기에게 고난이 온 것은 결코 죄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죄 없이 고난 받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욥 4:7).
이는 분명 잘못된 신념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욥보다 훨씬 이후의 시대에 살았던 아삽도 악인이 형통하고(시 73:3) 의인이 고난 받는 현실에(시 7:14) 신앙의 갈등을 겪으며(시 73:16)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시 73:2).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악한 자들은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시 73:1). 이는 당시의 보편적인 신념이었습니다(잠 19:23). 이런 신념은 예수님 때에도 만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을 때(마 19:23) 제자들인 놀란 이유가 그런 신념 때문이었습니다(마 19:25). 부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고,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고, 욥기가 우리에게 분명히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롬 15:4).
한편, 수아 사람 빌닷은 인생을 구더기와 벌레에 비유하며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을 비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달도 흠이 있고 별들도 완전하지 않은데(욥 25:5),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간이야 오죽하겠느냐는 것입니다(욥 25:6). 구더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톨라’는 벌레로도 번역되었는데(출 16:20) 일반적인 벌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벌레를 가리키는 단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진)홍색’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 말씀에서 ‘진홍같이’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톨라입니다. 이 벌레에서 홍색 염료를 얻었는데, 이 염료로 염색을 하면 색이 잘 바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같은 단어가 이사야 41장 14절에는 ‘버러지’로 번역되었습니다. 버러지는 벌레라고도 하는데, 이전 성경[개역한글판]에는 ‘지렁이’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빌닷의 주장처럼 결코 자신이 완전하다거나 혹은 죄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욥 9:2, 20). 단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죄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계속 보편적인 원리만을 들이대며 욥을 비난했습니다. 구더기와 벌레같이 보잘것없는 인생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논쟁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고난 받는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비난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욥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강요했습니다. 셋째, 일반적인 논리를 모든 상황에 적용하여 욥을 정죄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찾아왔으나 위로는 고사하고 오히려 상처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욥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비록 친구들의 충고가 자신의 상황과는 맞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겸손히 받아들였다면 서로를 비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잠 19: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닷의 말처럼 구더기와 벌레같이 보잘것없는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죄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이 깨끗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의롭다고 한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고, 아무리 깨끗하다고 한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럽고 추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이 의롭고 깨끗하게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밖에 없고(갈 2:16)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요일 1:7).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진홍같이 붉은 죄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고(사 1:18)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고전 10:31). 그런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