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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2025.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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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1장 16절 ~ 32절 [개역개정]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17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19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본 체 했다면
20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21 만일 나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22 내 팔이 어깨 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
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24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25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26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27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
28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30 실상은 나는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
31 내 장막 사람들은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는가
32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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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고난 받기 전 어떤 생활을 했는가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삶과 매우 닮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는 말합니다(미 6:8). 그는 유다의 왕들 곧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미 1:1).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로 이사야(사 1:1)와 호세아(호 1:1)가 있습니다. 요담과 히스기야 왕은 비교적 하나님을 잘 섬겼으나 아하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므낫세(왕하 24:3)와 더불어 남유다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왕하 16:2-4).

아하스가 남유다를 다스리고 있을 때 북이스라엘은 마지막 왕인 호세아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 시대는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재판하고, 제사장들은 대가를 바라고 가르치며, 선지자들은 돈을 받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미 3:11) 그들은 정의를 미워하고, 올바른 것을 그릇되게 하며, 백성을 억압하여 자신들의 만족을 채웠습니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은 죄악의 도시가 되어버렸고(미 3:10) 결국은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미 1:8-16). 그들이 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사 31:6 ; 55:7).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아닌 외적인 행위 곧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기 위해 내 맏아들을 드리고, 내 영혼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내 몸의 열매라도 바쳐야 합니까?”(미 6:6, 7)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가치를 정할 때 소는 질로, 양은 수량으로, 기름은 양과 질을 겸비해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 년 된 송아지나(레 9:3), 수천 마리의 양,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정도로 많은 기름은 최고의 제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가나안의 풍습으로 최상의 희생 제물로 여겼습니다(왕하 3:27). 이러한 풍습을 본받아 이스라엘에서도 종종 행해졌는데, 므낫세와 더불어 아하스도 이런 일을 행했습니다(왕하 16:3 ; 21:6). 몸의 열매 역시 자신에게서 가장 나은 자녀를 말하는 것으로 맏아들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자기의 전 재산을 바치려는 사람, 심지어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자녀까지 바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며, 그러한 의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진정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정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법적인 용어로 ‘정의를 행하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판결하라’는 의미입니다(신 1:16). 예를 들어, 재판할 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편을 들거나 권세 있는 자라고 하여 두둔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재판하라는 것입니다(레 19:15). 그런데 이게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재판관들은 뇌물을 요구했고, 뇌물의 유무에 따라 죄가 있고 없고 가 판가름 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억울함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암 5:12). 그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자(仁慈, mercy)도 없었습니다. 인자란 자비나 긍휼 혹은 은혜를 말하는데, 이를 히브리어로는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사랑 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사회적 약자들 곧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에게 인자를 베풀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억압했습니다(렘 7:6 ; 22:3 ; 암 4: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죄들을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좋은 제물을 많이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1-17)

진정한 회개가 없는 제물은 헛된 제물에 불과하며, 삶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죄를 뉘우칠 뿐 아니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일명 돌아온 탕자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으로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모두 탕진해 버렸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기에, 하는 수 없이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가서 붙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그를 들로 보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때 그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배불리 먹고 마시며 즐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고서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므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눅 15:12-20).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은 회개를 위한 첫걸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칠 뿐만 아니라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겔 18:30). 마음의 변화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비로소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신 30:8-9 ; 살전 1:9).

그리고 그것은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라는 것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한마디로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경건이라고 하는데(요 9:31), 이 악한 시대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삶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딤후 3:12). 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데 고통이 따르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상이 경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치 못한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니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연히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에 타협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에녹(창 5:24)과 노아(창 6:9)입니다. 에녹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습니까(창 5:24). 노아는 어떻습니까? 그 역시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노아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왕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방주를 지었을 때 그에 동조하는 사람은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꿋꿋하게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욥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을 속인 일도 없다고 말합니다(욥 31:5).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공평한 저울로 달아보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정직하고 순전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알게 되실 것이라 확신했습니다(욥 31:6). 또 욥은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에 따르면 욥은 일찍부터 고아를 자신의 아이처럼 길렀고, 과부를 돌보았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옷도 걸치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이나, 덮고 잘 게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털로 만든 옷을 입혀 주기도 했습니다(욥 31:20). 또 나그네에게는 거리에서 밤을 보내지 않도록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욥 31:32). 아울러 돈을 신뢰하거나 재산이 많다고 기뻐한 적도 없으며 해와 달을 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을 부인한 것이므로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죄악입니다(욥 31:28). 또 욥은 원수가 고통받거나 재난 당하는 걸 보고 기뻐하지 않았고, 그의 영혼이 저주받아 죽기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욥 31:30). 그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일들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욥 31:23). 이처럼 욥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 곧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욥기 1장 1절에 언급한 대로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즉 종교 지도자들에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 23:23). 그들은 곡식이 아닌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릴 정도로 율법에 철저했지만 정작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 아주 작은 일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반면에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는 소홀히 했습니다. 이는 좋은 제물을 많이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여겼던 미가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숫양 몇천 마리나 사람의 열매가 아니라 일상의 삶을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롬 12:1). 즉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일정한 형식의 예배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 따르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라고 했습니다(삼상 15:22).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다는 사울 왕에게 한 말입니다(삼상 15:21).

전도서 기자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이 말씀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제물을 바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제사도 제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건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솨마(명령형 쉐마)인데, 이 단어는 ‘경청하다’와 ‘순종하다’는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이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번역을 하거나 두 단어를 합쳐서 청종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르는 대로 잘 듣고 따른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더 기뻐하십니다.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삶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