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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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7절 ~ 12절 [개역개정]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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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가 활동했던 다른 어떤 도시보다 에베소에 더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다른 도시들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한 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의 소요 사태가 끝난 직후 그곳을 떠나 마게도냐 지방으로 갔습니다. 이곳에는 빌립보 교회를 비롯해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등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세운 기독교 공동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있는 제자들에게 여러 말로 권면한 후에 헬라로 갔습니다. 헬라는 당시 아가야 지방을 말하며, 바울은 그곳의 수도인 고린도에서 석 달을 있었습니다(행 20:2). 그는 이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 로마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롬 16:23). 그 후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고 곧장 수리아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무교절을 보내고 아울러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은 연보를 전해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롬 15:25, 26).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왔던 길 곧 마게노냐 지방을 거쳐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때 아시아까지 바울과 함께 가는 몇 사람들이 있었는데(행 20:4), 그들은 먼저 드로아로 가서 바울을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무교절 후에 빌립보를 떠나 네압볼리(행 16:11)에서 배를 타고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보통 이틀이면 가는 거리인데(행 16:11) 닷새가 걸린 것은 역풍 때문에 항해가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일주일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주간의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주간의 첫날’이란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을 말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막 16:9)로 ‘주의 날’ 혹은 줄여서 ‘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떡을 떼다’는 말은 ‘주의 만찬’을 가리킵니다(고전 11:20). 바울은 이튿날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모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만찬을 나누며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언제 또 그들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바울은 오랫동안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인 다락방은 3층이었는데,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이 오랫동안 강론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잠들었다가 그만 3층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사고로 죽은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교회에서 일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의 발단을 바울에게서 찾습니다. 그의 설교가 너무 길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같으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음 날 떠날 예정이었고(행 20:7) 언제 다시 그를 보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울의 설교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설교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음에도 누구 하나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바울의 설교는 이내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이 유두고 자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애초에 그가 창문에 걸터앉지만 않아서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가 깊이 졸았다는 건 바울의 설교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태도이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이 사건을 졸음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거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와는 달리 유두고를 옹호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가 창문에 걸터앉은 것은 나이 많으신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했거나 졸음을 쫓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당시 등불은 기름을 담은 등잔에 심지를 넣어 불을 붙이는 형태로 산소를 태워서 불을 밝힙니다. 그런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으므로 비록 창문을 열어 놓았다 해도 다락방의 공기는 혼탁했을 것이고, 산소의 농도 역시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졸음이 쏟아지자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창문에 걸터앉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유두고는 낮에 고된 일을 해서 몹시 피곤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졸음에는 장사가 없다고 졸음을 참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잠을 못 잔 것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고후 11:27).
이유야 어떻든 유두고는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고, 이 사고로 인해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바울이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의 몸을 안고 말하기를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했습니다(행 20:10). 바울은 엘리야나 엘리사가 그랬던 것같이 그를 살려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왕상 17:21 ; 왕하 4:34).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근거로 유두고가 잠시 정신을 잃고 죽은 사람처럼 된 것을 바울이 심폐소생술로 살린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죽어 있었습니다(행 20:9). 그럼에도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한 것은 바울이 그 위에 엎드려 그를 껴안았을 때 그가 다시 살아났거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실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후에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습니다(행 20:12). ‘위로’란 슬퍼하는 자의 마음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낙심하고 절망한 자에게 새 힘을 주고 격려하는 것을 말합니다(대하 32:6). 드로아의 성도들은 한 청년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낙심했으나 그가 다시 살아나므로 크게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41:10).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어수선했던 상황을 수습한 바울은 다시 올라가 사람들과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에 날이 밝자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행을 먼저 배편으로 앗소에 가게 하고 자신은 혼자 걸어서 갔습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직선으로 약 32킬로미터, 해안선을 따라가면 약 6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습니다(그림). 밤새도록 강론하느라 피곤했을 바울이 왜 굳이 걸어서 가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걸어서 앗소로 갔고, 다른 일행은 배편으로 앗소에 가서 바울과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배를 타고 미둘레네와 기오 그리고 사로를 거쳐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지방에서 지체하지 않으려고 에베소를 지나쳐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가능하면 오순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던 것입니다. 에베소는 그가 3년 동안 머물며 사역을 한 곳입니다(행 20:31). 그만큼 정이 들었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보다 예루살렘에 가는 일이 더 시급했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금한 연보를 전해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오순절을 지키려고 모여든 사람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방문하는 대신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까지 거리는 약 50킬로미터로 적지 않은 거리였지만 에베소 장로들은 마다하지 않고 밀레도로 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곧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보살필 것을 당부했습니다(행 20:28, 35).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복음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곧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고전 1:2 ; 살전 1:1 ; 고후 11:8).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다만 하나님의 교회를 보살필 책임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딛 1:7). 청지기가 주인행세를 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몇 가지를 권면을 한 후 무릎을 꿇고 다 함께 기도했습니다. 에베소의 장로들은 바울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그 말로 인해 몹시 슬퍼하며 배 타는 곳까지 바울 일행을 전송했습니다(행 20:3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청년이 집회에 참석했다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다는 것은 무척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자칫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사탄이 바울을 비방하고 집회를 방해하기 개입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전에 있었던 교회에서 40일 저녁 기도회를 했는데, 마지막 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집사님에게 귀신이 들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목사님과 교회가 한동안 곤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유두고가 다시 살지 못했더라면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비난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고후 1:3). 비록 우리가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41:10).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말고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