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성경본문 보기
로마서 1장 1절 ~ 7절 [개역개정]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설교문 보기
오늘부터는 로마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 곧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쓴 서신입니다(롬 1:1, 7). 바울은 3차 선교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3개월 정도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로마서를 기록한 걸로 보고 있습니다(행 20:3). 당시 로마에는 적은 인원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성령께서 강림하셨던 오순절에 로마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행 2:10)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후 로마로 돌아가서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기에 다른 지역에서 로마로 이주한 그리스도인들이 합류했을 것이고, 그들을 통해 복음을 들은 사람들 역시 공동체 일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 즉 로마 가톨릭에서는 베드로에 의해서 로마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신약 어디에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다거나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 초기 문헌들에 그런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만일 베드로가 로마에 갔었다면 분명 사도행전에 그 내용이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사역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로마 방문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미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집을 세우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곳에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였습니다(롬 15:20). 만일 베드로가 로마에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교회가 세워졌다면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아예 보내지 않았거나 최소 그의 이름을 언급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로마에 거주하던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이루어진, 이른바 평신도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로마 교회 성도들은 복음과 신앙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에 대해서 오해하거나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 혹은 믿음이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바울은 복음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그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는 바울서신 가운데 교리서신(롬, 고전, 고후, 갈, 살전, 살후)으로 분류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롬 1:1). 종으로 번역된 헬라어 '둘로스'는 단순한 하인이 아닌, 노예를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의 노예는 ‘언어를 가진 도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낱 물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노예는 법적인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했고, 보상이란 것도 없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있었던 노비와 같습니다. 노비나 노예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인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은 자기 삶의 주인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모두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이 아니면 우리가 누구란 말입니까? 주님이라는 말에는 주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로마서 10장 9절에서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주’를 가리키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기본적으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마 6:24 ; 20:8 등). 따라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그분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모시겠다는 것이고, 아울러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안에는,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더 깊은 신앙의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노예로 산다는 건 수치스럽고 불행한 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강제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며, 그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의 노예에게는 어떤 보상도 없지만, 그리스도의 종에게는 영원한 상급의 약속이 있습니다(고전 15:58).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고전 7:22).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주인 행세를 하지 않습니다. 종의 의무는 주인이 맡겨준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해 주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며,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이며 정체성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헬, 아포스톨로스)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파송된 자를 가리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용어가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사도라는 칭호는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열두 사도라고 합니다(마 10:2). 그 외에도 바울이나 바나바(행 14:4), 실라(살전 2:7) 등 적지 않은 사람이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엡 4:11). 오늘날에는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이 초대교회 시대와 같은 사도나 선지자의 직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따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했습니다.
1.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헬, 유앙겔리온)이란 ‘기쁜 소식’ 혹은 ‘좋은 소식’이란 뜻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국민에게 알리거나, 왕의 탄생 또는 자녀의 출생과 같은 기쁜 소식을 전달할 때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눅 2:10). 사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 곧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운명에 처한 죄인에게 구원에 관한 소식보다 더 기쁘고 좋은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마 1:1). ‘육신(헬, 사릌스)’이란 단순히 몸(헬, 소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가리킵니다(요 1:14). 이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히 4:15). 이를 성육신이라고 하는데(요 1:14),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지만, 그분의 공의는 죄에 대해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그 대가는 죽음(롬 6:23) 곧 피 흘림입니다(히 9:22). 그러한 이유에서 구약 시대에는 반드시 희생 제물이 있어야만 속죄 곧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레 4장). 다만 극빈자의 경우 짐승 대신 곡식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레 5:11). 이는 신분이나 형편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켜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례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의 경우 그 수량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레 2:1). 그러나 속죄제의 경우에는 그 수량이 정해져 있습니다. 고운 가루 에바 십 분의 일, 약 2.2리터를 드려야 합니다. 이 양은 당시 소(小) 가족이 하루 동안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식량이었다고 합니다. 비록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 배고픔의 고통을 느낄 만큼의 희생이었습니다. 이는 극빈자라 할지라도 진정한 회개와 희생의 마음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시 51:17).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모든 죄인에게 열려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애통해하며 회개하는 자만을 받아 주십니다(눅 18:13, 1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로써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크신 사랑을 나타내셨고, 동시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셨습니다(롬 6:23). 이 사건을 통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길 곧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히 10:20).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롬 5:1).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은 바울이 임의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며, 그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처음으로 주어졌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이란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갈 3:16, 19). 이사야 선지자도 이에 대해 예언한 바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히 4:15).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은 사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예표 합니다(요일 3:8). 반면에 뱀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가리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이로써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습니다(히 2:14).
또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자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선포되셨습니다(롬 1:4).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빌 2:6),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능력 있게 선포되고 세상 앞에 분명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행 2:32, 36).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행 2:38 ; 16: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롬 1:6). 이는 그들이 전에는 세상에 속한 자로서 죄의 종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 곧 그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뿐 아니라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비록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소유이며(벧전 2:9),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달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고전 6:20).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