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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025.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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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8절 ~ 17절 [개역개정]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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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회는 수적으로는 작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온 세상에 알려질 정도로 매우 신실했습니다(롬 1:8). ‘온 세상’이란 당시 로마 제국 전역을 가리키는 말로, 로마가 제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중심지였던 만큼 그들의 믿음은 자연스럽게 다른 지역에까지 전해졌을 것입니다. 비록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들의 신앙에 관한 소식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롬 1:9). 여기서 ‘말미암아’로 번역된 단어(헬, 디아)는 ‘통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를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와 감사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딤전 2:5).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요 16:24).

바울은 로마 교회에 관한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그곳 성도들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를 얻기 위함입니다. 11절과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간절히 보기 원했던 것은,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이 믿음 안에서 더욱 견고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롬 1:11). 그 은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교회의 영적인 성장과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을 가리키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임의로 성령의 은사를 나눠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성령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도, 권한도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고전 12:11). 그럼에도 바울은 성령의 은혜를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은사를 나누어준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은사를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로마 교회가 믿음 안에서 더욱 견고해지고 영적으로 성장하길 원했습니다.

아울러 바울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믿음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를 나누기 원했습니다(롬 1:12). 이것이 바로 신앙 공동체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위에 세워진 공동체로서, 성도들이 함께 은혜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격려함으로써 서로에게 힘과 위로를 주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13절부터 14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여기서 헬라인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이고, 야만인은 그리스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낮춰 부르던 표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 역시 헬라인의 관점에서는 야만인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을 이방인이라 부르며 멸시했지만, 헬라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야만인이라 칭하며 경멸했던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당시에는 모든 민족이 헬라인 아니면 야만인 혹은 유대인 아니면 이방인으로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헬라인과 야만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도, 민족을 둘로 구분하거나 차별하려는 게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문명인이라 자랑하는 헬라 사람들이나 그들이 미개한 백성이라 멸시하는 야만인이나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진리입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것으로, 복음에는 순서가 있지만(롬 1:16하) 결코 차별은 없습니다(롬 3:22).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롬 3:29) 혹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롬 1:14)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모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요 3:16).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 교회 성도들은 이미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롬 1:6).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롬 1:7). 그런데 그들에게 또다시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는 복음을 더 깊이 깨닫게 하고 그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직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복음을 전하여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1:13하). 바울은 이 두 가지 사역을 통해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이를 기반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바울은 로마를 통해 서바나 곧 스페인에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롬 15:23, 28). 이처럼 바울은 여러 가지 이유로 로마에 방문하기를 원했지만, 그 길이 막혀있었습니다. 길이 막힌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롬 1:10). 

 

이제 바울은 서론을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복음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자세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마디로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요 3:16).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될 죄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기쁘고 좋은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 1:16). 이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역사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리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고전 1:23 상). ‘거리끼는 것’이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란 뜻으로, 유대인들은 복음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여기며, 오히려 그것을 장애물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복음을 유대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형은 가장 악한 죄인이 받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 형벌을 받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자라고 하니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치부했습니다(고전 1:23하).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복음을 믿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고, 복음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복음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롬 1:17상).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란 표현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을 어떻게 의롭다고 여기시고 구원하시는지를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지 그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롬 3:28). 그런 맥락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표현도 구원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식 즉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바울은 하박국 2장 4절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원문에는 ‘오직’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는 번역자가 ‘그러나’ 혹은 ‘그리고’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접속사 ‘데(δέ)'를 ‘오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러한 번역을 오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문맥상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번역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이 진리를 깨닫고 마치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기쁨과 자유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죄와 죽음 그리고 영혼의 구원에 대해 깊이 고민하다가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수도원이 천국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탁월한 길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수도원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수도사들은 대체로 세상과 단절된 채 금욕과 절제의 생활을 했습니다. 근래에 어느 수도사들이 생활하는 걸 봤는데, 그들은 하루 한 끼, 그것도 반찬 없이 밥만 먹었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금욕과 절제의 생활을 하니 루터 당시의 사람들은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하기만 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루터는 그곳의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으며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절제하며 생활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했고, 금식도 했습니다. 그는 영혼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했고, 로마에 있는 스칼라 산타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이 계단 28개로 되어 있는데, 이를 무릎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로마가톨릭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무릎에서는 피가 났으나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영혼의 평안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자신의 선한 행위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깨닫고 루터는 마치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기쁨과 자유를 경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습니다(행 16:31).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단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 사람들처럼 문명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멸시하는 야만인이나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믿으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복음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만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