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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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장 14절 ~17절 [개역개정]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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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까지 포함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화평’은 분쟁이나 다툼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샬롬’,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평안’이나 ‘평화’ 혹은 ‘화목’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같은 식구끼리, 또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과도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떻게 신앙이 다른 불신자 특히 교회에 적대적인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교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5:39). 이 말씀은 누군가가 나에게 악의적으로 행동하더라도 그에 대해 보복해서는 안 되며,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율법을 초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피해자가 입은 손해와 똑같이 가해자를 처벌하도록 했습니다(출 21:23-25). 즉,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를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 혹은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고 하는데, 이 법칙은 무분별한 복수를 막고, 법을 통해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취지에서 제정되었습니다(신 19:20). 고대에서는 대부분 이 법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법칙보다 사랑의 법칙을 더 강조하셨습니다. 심지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마 5:44). 복수를 멈추고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수는 감정을 악화시키고, 갈등을 지속시킬 뿐입니다. 반면에 사랑과 용서는 관계를 회복시키고,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말고,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롬 12:17). 더 나아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롬 12:18). 그렇다고 이것이 화평을 위해 불의와 타협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불의와는 결코 타협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함을 따라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구별’ 혹은 ‘분리’를 뜻하며, 이는 성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세상과 구별된 존재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 역시 거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레 19:2). 이는 구약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벧전 1:15).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나 기준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나 자기와 관련된 일을 위해 살아가지만, 성도는 무엇을 하든, 심지어 먹고 마시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고전 10:3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제일 된 목적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로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지니고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성경에서 ‘흰옷’으로 비유됩니다. 이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성도들이 입는 것으로(계 7:14), 새로운 신분과 거룩한 삶을 상징합니다(엡 4:24). 성도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되, 흰옷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로서의 마땅한 삶입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고후 6:1).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자들이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히 12:14하),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와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히 12:5상).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자세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히 12:5하). ‘쓴 뿌리’란 신명기 29장 18절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 우상숭배와 관련 있습니다. “오늘 너희 중에 남자든지 여자든지 가족이든지 지파든지 마음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서 이런 민족들의 신을 섬기기 위해 가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되며, 너희 가운데 독초와 쑥의 뿌리가 있어서도 안 된다.”(바른성경) 쑥은 그 쓴맛 때문에 고통이나 고난을 비유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독초가 쑥과 함께 언급된 것은 우상숭배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마치 쓴 뿌리와 같아서 신앙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키며, 그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영적으로 더럽혀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를 살피고 격려하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가 없도록 주의하라고 권면했습니다(히 12:16). 여기서 ‘음행하는 자’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부도덕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앙을 저버린 영적으로 타락한 자도 포함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입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가정에서 아버지를 계승하는 맏아들의 권리를 의미합니다. 장자는 그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고, 재산 상속 시에는 다른 형제의 두 몫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신 21:17).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장자는 영적인 축복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에서는 이삭의 맏아들로서 장자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음식 한 그릇에 팔아버리는 망령된 행동을 했습니다. ‘망령되다’란 말은 ‘세속적이다’라는 뜻으로, 신앙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을 경시하는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은 창세기 25장 29절 이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란성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외모뿐 아니라 성격과 행동이 전혀 달랐습니다. 에서는 몸이 붉고 털이 많았으며, 들에서 사냥하기를 좋아하는 활동적인 성격이었습니다. 반면 야곱은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을 지녔으며, 장막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서가 “배가 고프니 그 붉은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에서는 ‘붉다’라는 뜻을 가진 ‘에돔’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창 25:30). 야곱은 팥죽을 달라는 에서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형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자신에게 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는데 이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팥죽 한 그릇을 먹는 대가로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장자의 명분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럼에도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릴 정도로 장자의 명분을 너무 가벼이 여겼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를 ‘망령된 자’로 표현했습니다(히 12:16).
에서는 불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팥죽 한 그릇, 즉 현세적인 만족을 위해 장자의 명분이라는 영적인 가치를 소홀히 여기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훗날,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구했지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잃어버린 장자의 복을 도로 찾기 위한 눈물이었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일도 없겠지만 설사 에서가 자기 잘못을 회개한다고 해도 장자의 축복을 되돌려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미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기기로 맹세했기 때문에(창 25:33), 그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했습니다(마 5:33). 이삭이 아버지라고 해서 그것을 마음대로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는 없었습니다(창 27:37). 에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소홀히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후회할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애원해도 소용없습니다. 한 번 닫힌 구원의 문, 축복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마 25:10).
오늘날에도 에서와 같이 현실의 문제에 급급하여 신앙을 등한시하거나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에서의 망령된 행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 수 없듯이, 세속적인 것을 위해 영적인 것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따라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화평만으로 성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함’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고, 동시에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울러 에서와 같이 한 그릇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파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신앙의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