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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2025. 5. 15.
성경본문 보기

시편 8편 1절 ~ 9절 [개역개정]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설교문 보기

시편 8편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여호와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는 뜻을 지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입니다. 이 성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만물의 근원이자 주인이심을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며, 결국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롬 11:3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는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 있으며, 그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지식이 많고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셨다”라고 말합니다(시 8:2). 여기서 ‘주의 대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를 자랑하는 교만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강하고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겸손한 자들의 입을 통해 주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마 11:25). 이는 원수들과 보복하는 자들을 잠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미련한 사람들을 택하셨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있는 자들을 쓸모없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비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 그리고 없는 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러므로 지식이 많고 지혜롭다고 해서, 또 권력이나 재물을 가졌다고 해서 자랑할 필요도 없고,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눅 12:20).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시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지식과 지혜, 권력과 재물 등 앞에서 언급한 것들을 모두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로서 누구보다 율법에 정통했습니다(마 2:4). 그러나 정작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요 5:39),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눅 17:20).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마 21:9).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외세의 억압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역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하소서’(시 118:25)라는 뜻의 호산나를 외치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는 어린이들이 큰 소리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며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마 21:15). 여기서 어린이들은, 성전에서 율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5세 이상의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보통 성전 내에서는 조용하고 경건한 태도가 요구되었습니다. 탈무드(예루살렘版)에 따르면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경건과 질서 그리고 조용한 태도가 강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성전에서 소리를 질러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로 부르며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달리 메시아의 오심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고 전혀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인해 자신들이 누려 온 기득권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화가 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마 21:16)며 예수님께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들의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라고 하시며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오늘 본문인 시편 8편 2절의 일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시 8:3)에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라는 부분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다”로 번역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인용하셨습니다. 여기서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다(κατηρτίσω αἶνον)’라는 말은 ‘찬양을 준비하셨다’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준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성전에서 아이들이 자신을 찬양하는 게 합당함을 밝히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찬양하지 않거나 찬양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돌들이라도 대신 소리 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9:40). 이는 사람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주시라는 사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에 이르지만,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요 3:36). 이는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진리이기에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바뀌지도 않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절대적인 주권과 위엄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시 8:3). 아울러 그 속에서 인간을 향한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여기서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노쉬’는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본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간을 기억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드러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원수는 미워하고 자기 아들은 사랑합니다. 또 원수를 희생해서라도 아들을 보호하거나 유익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원수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요 3:16 ; 롬 5:8).

다윗은 또 주님께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했습니다(시 8:5). 여기서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로힘’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70인 역을 비롯한 초기의 역본들 가운데 상당수가 히브리어 ‘엘로힘’을 ‘천사들’로 번역했습니다. 성경에서 ‘엘로힘’은 대부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이지만 종종 ‘신적인 존재’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가운데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첫 번째 계명에서 ‘신들(god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엘로힘’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엘로힘’을 ‘천사들’로 번역한 70인 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히 2:7)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에 대하여 이 시편 구절을 적용한 것은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천사보다 잠시 혹은 조금 못한 상태,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 ‘에노쉬’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빌 2:7). 이는 죄인을 구원하시고(딤전 1:15),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일 3:8).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친히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는, 죄인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져야 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길 외에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뿐입니다(요 14:6).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고난을 통해 영화와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 쓰셨습니다(히 2:9). ‘영화와 존귀’는 왕의 표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 되셨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고난을 감당하신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히 2:8).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지만, 그 승리가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악이 득세하는 듯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될 것이고, 그때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영화와 존귀의 관을 받으신 것은, 죽음의 고난을 감당하신 결과입니다(히 2:9).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고,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심으로 영광 가운데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면, 그분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합니다(롬 8:17).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마 16:24). 때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기도 하고, 불이익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8).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능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으로 인한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디어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딤후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