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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죄에 대하여 죽은 자

2025. 6. 19.
성경본문 보기

로마서 6장 1절 ~ 11절 [개역개정]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설교문 보기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죄를 규정하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롬 5:13). 사람들은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롬 3:20). 그런데 바울은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죄를 더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롬 5:20 상). 이는 율법을 통해 사람들의 죄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고, 그로 인해 죄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분명해질수록 죄는 더욱 증가하게 되는데, 이는 이전에는 죄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까지 죄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롬 5:20). 아무리 크고 많은 죄일지라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용서하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죄가 죽음을 통해 왕 노릇하며 사람을 지배한 것 같이, 은혜도 의를 통하여 사람들을 다스림으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5:21). 한 마디로, 어떤 죄를 지었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 5:17).

그런데 이 말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면 계속 죄 가운데서 살아도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은혜를 더 받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단호히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롬 6:2). ‘죄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것은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세례와 연결하여 설명했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그 믿음의 표현으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물론 세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를 거부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세례로 번역된 헬라어 ‘밥티스마(βάπτισμα)’는 ‘물에 완전히 담그다’라는 뜻의 동사 ‘밥티조(βαπτίζω)’에서 유래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의미하고, 다시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남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입니다(롬 6:4). 이처럼 세례는 단순한 외적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롬 6:5). 그러므로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해서 이를 거부하거나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 수 없고, 살아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롬 6:6).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는 더 이상 죄가 자기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롬 6:12).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곧 의인이 되었습니다(롬 3:24).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와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의 성품이 남아 있어서, 때로는 죄를 짓고 그로 인해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롬 7:19-24).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마 6:12; 눅 11:4), 우리는 여전히 매일의 삶 속에서 죄를 짓고 있으며, 그 죄를 자백하며 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요일 1:9).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힘써야 하지만, 그럼에도 연약함과 부주의로 인해 지은 죄들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회개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회개하는 것은 오히려 죄 사함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라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자들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요 13:10). 이미 목욕한 사람은 매일 손발만 씻으면 되는 것처럼 이미 거듭난 사람은 또다시 중생할 필요가 없으며, 매일의 삶 속에서 짓는 죄만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요일 1:9). 이처럼 회개는 구원받지 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받은 자에게서 마땅히 나타나야 할 삶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필요 없다거나 믿음이 없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로서, 단지 죄를 멀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처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롬 6:13).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도구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3:16, 17). 종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죄에게 종이 되든지 하나님께 종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주인인 죄를 섬길 수 없고 섬겨서도 안 됩니다(롬 6:17, 18). 성도가 섬겨야 할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의 종으로서 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았으며, 그 결과 영적 사망 즉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롬 6:21). 하지만 이제는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롬 6:22).

이러한 죄와 의의 관계를 바울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여기서 ‘삯’이란 군인들이 받는 보수로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일을 하면 그에 대한 보수를 받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사망 곧 영원한 죽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사 즉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 6:23). 어느 나라에 살인을 저지른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집행을 하루 앞두고 교도관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왕께서 특별히 당신을 사면하셨습니다. 오늘부로 당신은 자유인입니다.” 죄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는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사형이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저를 살려주시는 겁니까?” 교도관은 대답했습니다. “왕의 아들이 대신 형벌을 받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죗값을 대신 치렀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자유입니다.”

이는 지어낸 이야기로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영생은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분께 나아오기만 하면, 이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해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지체를 더 이상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롬 6:6).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반드시 그분과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롬 6:8).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사시는 것입니다(롬 6:10). 이와 같이 우리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자로 여겨야 합니다(롬 6:11).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고, 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갈 5:24),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