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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어리석은 자

2025. 6. 29.
성경본문 보기

시편 14편 1절 ~ 7절 [개역개정]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설교문 보기

어떤 다섯 살 난 아이가 할아버지께서 주신 백 달러짜리 지폐를 거절했습니다. 저금통이 가득 차 있어 지폐를 넣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보니 손자의 저금통에는 1센트 동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거절했던 백 달러는 1센트 동전 만 개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백 달러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사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어리석은 자들이 많습니다.

히브리어로 ‘어리석은 자’를 뜻하는 말은 ‘나발’입니다. 다윗의 아내 아비가일의 전남편 이름도 나발이었습니다(삼하 2:2). 그는 성격이 완고하고 행실이 악했습니다(삼상 25:3). 그의 아내와 하인들조차 그를 ‘불량한 사람’(삼상 25:17 ; 25:25)이라고 부를 정도로 나발은 미련할 뿐 아니라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 이러한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뛴다고 말합니다(시 12: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란 경건한 자와 진실한 자보다 오히려 거짓말하는 자들과 아첨하는 자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시대를 의미합니다(시 12:1, 2). 한 마디로,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시대입니다. 그들은 거짓이나 협박을 통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떠벌립니다.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시 12:4).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라 여기는 교만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리석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어리석은 자인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시 14:1 상). 그래서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여기며, 부패하고 가증한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시 14:1 하). ‘가증하다(히, 토에바)’라는 말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 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혐오스럽고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을, 사람이나 짐승 심지어 곤충처럼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이는 썩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는 어리석고 참담한 행위입니다(롬 1:2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반복해 왔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쉽게 우상 숭배에 빠졌던 것일까요? 사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여호와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머물러 있을 때부터 우상을 숭배했습니다(수 24:14 ; 겔 20:7). 그렇다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에 애굽 사람들의 우상까지 숭배했습니다. 한마디로 혼합주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이 섬겼던 대표적인 우상은 송아지와 숫염소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짐승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우상 숭배를 엄격히 금하면서(레 17:7),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 5). 여호와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로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마 28:19 ; 고후 13:13 ; 요일 5:7). 물론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작년 삼위일체주일에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https://yeum.tistory.com/671).

우상 숭배 외에도,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동성애입니다(레 18:22).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 1:28). 이는 남자와 여자, 이성(異性)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룰 때만 가능한 것으로(창 2:24),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 질서 곧 순리(順理)입니다. 이 질서를 거스르는 것은 역리(逆理), 즉 죄이며(롬 1:26), 이런 현상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동성애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을 일관성 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레 18:22 ; 고전 6:9 ; 딤전 1:10 etc.). 그렇다고 동성애를 다른 죄들보다 더 나쁘거나 용서받지 못할 죄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불공정 거래를 동성애와 같은 죄로 취급합니다(신 25:13-16). 이에 대해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가져올 정도로 중대한 죄인데, 어떻게 그런 죄를 불공정한 거래와 같은 선상에서 다룰 수 있느냐며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동성애와 불공정한 거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를 파괴하는 가증한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을 만큼 불의한 죄들입니다(고전 6:9-11). 이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다면 감히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해 선뜻 ‘그럴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 중에도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삶을 일일이 감찰하시며,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롬 2: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말과 행실을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2. 영혼의 일에 무관심한 자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시기 전 세상은 완전히 부패하였고 온갖 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창 6:11).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직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곧 세상일에만 마음을 쏟았습니다(마 24:38).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는 데만 몰두할 뿐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눅 7:28). 그러다가 홍수가 일어나고 불과 유황이 쏟아질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운명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말입니다. 그는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지금 있는 곳간으로는 그 많은 곡식을 다 저장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시며,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아가면 네가 지금까지 쌓아 둔 게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눅 12:20). 그가 해야 할 일은 소출을 저장할 더 큰 곳간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소출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기도 합니다(눅 12:33).

인간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생명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 즉시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럼에도 미래의 시간이 마치 자기 손안에 있는 줄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인생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영혼이나 영원한 세계보다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질 안개와 같은 육체와 이 세상에서의 시간만을 염려하며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우선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지만,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마 7:24-27). 이 비유는 당시 이스라엘의 지형을 알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와디(wadi)’라고 불리는 건천(乾川)이 많습니다. 평소에는 마른땅처럼 보이지만, 폭우가 쏟아지면 순식간에 급류가 흐르는 위험한 지역으로 변합니다. 그곳은 모래나 자갈로 되어있어서 집을 짓기는 수월하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가 오고 물이 불어나면 금세 휩쓸려 무너지고 맙니다. 반면에 반석은 단단한 암석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견고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이런 지형이 많으며, 시온이라 불리는 성전산도 견고한 암반 위에 세워졌습니다.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홍수가 나고, 폭풍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집은 비록 쉽고 빠르게 지을 수 있어도, 언제 무너질지 몰라 늘 불안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쉽게 흔들리지 않듯, 신앙도 기초가 튼튼해야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듣지 않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는 마치 거울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돌아서서 곧 잊어버리는 자와 같습니다(약 1:23, 24). 거울을 보는 이유는 자기 얼굴이나 머리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하고 단정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 없이 그냥 돌아선다면, 거울을 본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목적은 단지 듣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반석 위에 세워진 집처럼 어떤 환난과 유혹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온갖 악을 행합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듯 여깁니다(시 14:4). 그들의 마음이 부패했기에, 그 행실 또한 가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들의 관심사는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와 관련된 일뿐입니다. 세상의 정의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안중에도 없고, 나라가 어떻게 되든, 이웃이 어떤 처지에 있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잘 살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불법도 서슴지 않고, 자기의 유익이 될 법한 사람들에게는 아첨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멸시하고 힘없는 자들은 억압합니다. 그런 자들에게서 선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시 14:1, 3). 그들로부터 억압받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곧 의인을 가리킵니다(시 14:4).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핍박받는 현실에서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시 13:1), 그분은 언제나 의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정하신 때에 그들을 안전한 곳에 두시고(시 12:5), 악인들의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는 끊어버리실 것입니다(시 12:3). 이는 마치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된 은처럼 순결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이기에(시 12:6), 우리는 그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환난 중에 우리가 만날 큰 도움이시며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시 14:6).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절망 가운데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록 현실은 여전히 어둡고 힘겨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로 세워질 것입니다. 다윗은 그날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소망을 품었습니다(시 14:7).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의 눈으로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부정하며 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영혼의 일에는 무관심한 채 오직 육체적 평안만을 추구했던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