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의 영을 받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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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12절 ~ 17절 [개역개정]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설교문 보기
바울은 7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롬 7:24 상). 이 표현은 절망과 고통의 늪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하고 처절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 힘썼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습니다(빌 3:6). 그러나 인간은 결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사망의 몸’이라고 표현하며, 이 상태에서 누가 자신을 건져줄 수 있겠느냐고 절박한 심정으로 외치고 있습니다(롬 7:24 하). 그리고는, 즉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라고 고백합니다(롬 7:25).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여전히 ‘곤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기에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 안에 죄의 법이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했고, 그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으며 괴로워했습니다. 즉,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려고 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 것입니다(롬 7:25 하). 그러다가 바울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여전히 죄의 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롬 8:1).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날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대의 사본들에는 이 구절 뒤에 ‘그들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는 문구가 첨가되어 있습니다(KJV).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들을 해방했기 때문입니다(롬 8:2).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란 뜻으로,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이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요 3:3), 곧 죄와 그 결과인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의미합니다(요 5:24).
율법은 사람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결국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데 실패했습니다(롬 8: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그 육신에 죄를 정하게 하심으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8:4). 여기서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1절에서 언급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죗값을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치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인류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취하신 조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엡 2:8). 그러므로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영을 따르는 자’입니다. 반면에 ‘육신을 따르는 자’도 있습니다(롬 8:5). 그러면,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육신을 따르는 자
‘육신을 따르는 자’란 거듭나지 않은 자,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고린도전서에 언급한 ‘육신에 속한 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고전 3:1). 성경에는 ‘어린아이’라는 표현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셨는데(마 18:3), 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성품을 가진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어린아이는 신앙의 성장이 없는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으나 이제 막 신앙에 입문한 사람처럼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부드러운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히 5:12). 이와는 달리, 로마서 8장의 ‘육신을 따르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롬 8:5). 이는 죄의 본성에 따라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삶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법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8:7). 그런 자들의 결국은 사망 곧 영원한 형벌입니다(롬 8:6).
2. 영을 따르는 자
육신을 따라 사는 자들과 달리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영의 일’이란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말하며, 이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쏟는 삶을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에게도 바울처럼 때때로 육신의 생각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따라 사는 존재이므로 그의 마음은 당연히 영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합니다. 이런 삶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 있는데, 바로 에릭 리델(Eric Liddell)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192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8회 하계올림픽에 영국의 육상 대표로 출전했습니다. 그의 주 종목은 100m 경주였고,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100m 예선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에릭은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일에는 하나님의 일만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00m 예선 경기가 열리는 주일, 그는 경기장이 아닌 한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인들은 그를 가리켜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신앙을 소매 끝에 달고 다니는 신앙심 깊은 척하는 위선자’, ‘조국의 명예를 저버린 자’라며 비난했습니다. 에릭은 자기 주 종목이 아닌 200m에서 동메달을 땄고, 400m에도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가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주 종목이 아니었고, 그보다 기록이 좋은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승 후보들을 제치고 세계 신기록까지 세우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가 결승전에 나서기 전, 팀의 안마사가 그에게 전해 준 쪽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기라”(삼상 2:30)라는 성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우승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처음 200m는 제힘으로 달렸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달렸습니다.” 이후에 그는 자신이 태어난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진정 영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영을 따르는 자는 사람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반면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한시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롬 8:14). 즉,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그런 삶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나무는 열매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육신을 따르는 자인지 혹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인지는 삶의 열매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롬 8:15 상). ‘양자’란, 입양을 통해 자녀의 자격과 신분을 얻은 사람을 말합니다. 법적으로 상속권을 포함하여 친자녀와 동일한 지위와 권리를 가집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죄의 종으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롬 6:16; 요 8:34).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8:15 하). 여기서 ‘아빠(아바)’는 단순한 유아적 표현이 아니라, 깊은 친밀감과 동시에 존경과 신뢰가 담긴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막 14:36). 또한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해 주십니다(롬 8:16).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 된 자로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내적인 갈등을 겪게 될 것이며, 외부로부터의 방해 또한 계속될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로 고난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친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특권만을 누리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상속법에 따르면, 자녀는 부모의 재산뿐 아니라 부채도 상속받게 되어 있습니다(민법 제1005조). 만일 부채의 상속을 원하지 않는다면 재산의 상속도 포기해야 합니다. 둘 다 승계하든지, 둘 다 포기하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자의 상속은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당연히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친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권리뿐만 아니라 그분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고난이 없이 영광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롬 8:17).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으로 인해 핍박받았습니다. 지금도 고난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기독교인 가운데 1/7이 신앙을 이유로 박해받고 있다고 합니다(www.opendoors.or.kr). 그럼에도 끝까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살아가는 이유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지금 우리가 겪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8:18). 우리도 믿음의 선조들처럼 신앙으로 인해 겪는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육신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