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음TV/수요예배설교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2025. 7. 17.
성경본문 보기

로마서 9장 1절 ~ 13절 [개역개정]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설교문 보기

바울은 자신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롬 9:1). 그 이유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 때문입니다(롬 9:3). 그는 동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는 일조차 감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속된 말로 ‘지옥에 가도 좋다’는 의미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만큼 동족 유대인을 향한 간절한 사랑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도 바울과 유사한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을 때, 모세는 그들을 대신해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간청했습니다(출 32:32). 이는 바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세가 정말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깊은 사랑과 열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것을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신 7: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여러 가지 특권이 부여되었습니다. 곧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입니다(롬 9:4). ‘양자 됨’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자녀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4:22).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믿는 자들과 같은 양자 됨의 권리(롬 8:15-17) 즉 친자의 지위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불렸을 뿐입니다. 그 관계는 언약에 기반한 것이므로, 언약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그 지위와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출 19:5, 6).

그리고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을 때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산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출 24:16).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충만했고(출 40:34),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도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왕상 8:10).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직접 체험한 유일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나타났습니다(요 1:14).

또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특권 중에 언약들이 있습니다. 이 언약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과 야곱을 거쳐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승된 약속들입니다. 율법 또한 이 언약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레 20:8). 하나님께 대한 예배 역시 이스라엘의 중요한 특권입니다. 물론 이방 종교에도 예배의 형태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출 20:4; 호 8:4). 반면에 이스라엘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방식에 따라 드려 졌으며, 그 안에 구속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방 종교의 예배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똑같은 희생제물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의 제사는 죄 사함과 구속이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에, 이방의 제사는 단지 복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받은 특권은 약속들입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언약들과는 강조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관계 자체를 강조하는 개념이고, 약속은 그 언약 속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언약이 그릇이라면 약속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으로는 그들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롬 9:5).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받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의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외면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과 약속은 실패로 끝났고,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도 더 이상 효력이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결국 언약과 약속이 실패로 끝났으니, 하나님의 말씀도 폐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곧 약속이 폐하여진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났다고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롬 9:6),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의 자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롬 9:7).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 9:7; 창 21:12). 즉, 육신의 자녀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라야 참된 자손으로 여겨진다는 말입니다(롬 9:8). 이는 바울이 2장에서 언급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롬 2:28, 29).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 전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롬 9:9: 창 18:10), 그 아들 곧 이삭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7:19). 그뿐 아니라 이삭과 결혼하여 쌍둥이를 잉태한 리브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고 하셨습니다(롬 9:12; 창 25:23). 이는 하나님의 택하심, 곧 선택이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그분의 뜻에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성경에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롬 9:13; 말 1:2, 3). 그런데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공정하지 않으신 분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이 불의하거나 불공정하다는 생각 자체를 단호히 거절합니다(롬 9:14).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며, 그분의 성품상 그렇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출 33:19)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이 원하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달려 있습니다(롬 9:16).

또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롬 9:17; 출 9:1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롬 9:18).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롬 9:19). 하나님께서 모든 걸 주권적으로 정하셨다면, 사람은 그에 대하여 거역할 수가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토기장이는 같은 진흙으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또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롬 9:21). 여기서 토기장이는 하나님을, 진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롬 9:20).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마치 그릇처럼 아무런 의지도, 책임도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단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렘 18: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9장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멸망하도록, 또 어떤 사람은 구원받도록 미리 정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미리 정하셨다”(29)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어떤 기준이나 원칙 없이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지 곧 미리 아심을 근거로 한 결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으로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할지를 미리 아시고 그에 따라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억지로 믿게 되거나 억지로 거절하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복음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거부하는 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롬 10:17-21). 따라서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주권은 예지에 따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왕이 신하들을 보내서 초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다시 다른 신하들을 보내 잔치가 풍성하게 준비되었으니 오라고 하자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한 사람은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사업하러 떠났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이 베푼 잔치에 초청받고도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질병이나 사고 등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만사를 제쳐두고서라도 참석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핑계를 대며 왕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왕이 보낸 신하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들이 더 이상 왕의 백성이기를 거절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에 왕은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 그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신하들에게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격이 없으니, 너희는 길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잔치에 초대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길에 나가서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했습니다. 그중에는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도 있었고, 악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얼마 후 왕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려고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보통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예복을 입고 참석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길거리에서 바로 온 사람들이 예복을 입고 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이 그들에게 예복을 나눠주었을 텐데, 그럼에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그에게 “어째서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라고 물었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왕은 신하들에게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라고 했습니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부르심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한 자만이 택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혼인 잔치에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마 15:24).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아 다른 민족보다 먼저 천국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후에 천국 복음은 이방인들로 향하게 되었는데(행 13:46; 롬 11:11), 나중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는 천국의 복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선한 자나 악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의미합니다(막 16:15). 그리고 왕이 나눠준 예복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의의 옷이요 구원의 옷입니다(사 61:10; 롬 3:24). 당연히 입어야 했고, 입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그럼에도 입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복음을 거절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지 않고, 여전히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엡 4:22).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과 함께 바깥 어두운 곳에 내 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인데, 그때 비로소,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한 대가가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보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새사람으로 옷 입은 자들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새 사람을 입으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