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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2025. 7. 21.
성경본문 보기

시편 16편 1절 ~ 11절 [개역개정]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설교문 보기

이 시편에는 ‘믹담’이라는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대의 랍비들은 이를 ‘황금’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마도 이 시가 황금처럼 귀하고, 순전한 신앙 고백이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시가 과연 어떤 고백을 담고 있는지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로 피하나이다”(시 16:1). 이는 당시 다윗이 고난 중에 있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늘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성도를 항상 도우시는 분이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시 46:1).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시 16:2). ‘주는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도마의 신앙 고백을 떠올리게 합니다. 비록 그는 잠시나마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기는 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는 앞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 것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 부른 것은 단순히 존경의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행복이며,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토브’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창 1:4, 10, 18, 21, 25, 31). ‘토브’는 ‘좋은’ 혹은 ‘선하다’라는 뜻으로, 이 단어가 들어있는 부분을 직역하면 “나의 선함은 주께 미치지 못한다”가 됩니다. 이 고백은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이 아무리 선하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만큼 사람은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으며, 설령 선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미미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고, 그분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없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성도는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에서도 행복을 찾으려 하거나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땅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존귀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시 16:3 상). 그들은 비록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기에 존귀한 자들입니다. 이는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대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존귀한 사람으로 평가받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구별되어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하지만 그런 삶 때문에 오히려 성도는 세상에서 환난을 겪기도 합니다(딤후 3:12). 이는 성도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요 15:19). 그럼에도 다윗은 자신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다윗에게는 그 어떤 자들과 함께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성도가 예배보다 세속적인 모임에 더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보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면, 그는 참 성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요일 2:15). 성도라는 말 자체가 세상과 구별된 자를 뜻하기 때문에,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성도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모순입니다.

그런데 성도라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세속적인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우상 숭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야 그렇다 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은, 그들이 참된 성도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에 다윗은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시 16:4 상).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토록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계 21:8). 또한 다윗은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시 16:4 하). ‘전제(奠祭)’는 포도주나 독주를 제물 위에 부어 드리는 제사로(민 15:5; 28:7),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상징합니다. 비록 피를 직접 붓는 것은 아니지만 포도주가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 제사를 가리켜 ‘피의 전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방 종교의 제사에서는 동물의 피를 직접 붓거나 뿌리는 의식이 자주 행해졌으며, 때로는 인신 제사의 형태로 사람의 피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셨으며(레 18:21; 렘 32:35), 다윗 또한 그런 제사는 드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자기 입술로 그 이름조차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방 신들의 이름은 입에 담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 23:13). 고대 근동 문화에서 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그 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명령은, 그 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많습니다(고전 8:5). 사람은 물론이고, 각종 짐승과 심지어 벌레도 있고, 돌이나 나무, 별 같은 무생물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 대표적인 우상의 도시가 아덴이었습니다(행 17:16). 도시 이름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Αθηνά)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성에 세워진 신상만 3만 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의 제단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아덴은 우상의 중심지였습니다(행 17:23). 일본에는 약 8만 개의 신이 있다고 하며, 힌두교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섬기는 것은 신이 아니라 단지 ‘신이라 불리는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신 6:4; 요 17:3). 다윗은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만을 참된 신으로 섬겨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산업이자 잔의 소득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시 16:5). ‘산업’은 물질적인 유산을 뜻하고, ‘잔의 소득’은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분복을 의미합니다. 이 둘은 삶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부가 되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미래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그 결과, 다윗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곳’은 다윗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다윗이 살았던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볼 때 아름다운 땅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주변에 감람산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척박한 땅입니다. 강수량이 적어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그 땅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영광스러운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행복이며,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2절의 고백과 같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고 그 안에서 만족과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인도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 16:7). 여기서 ‘훈계’란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을 밝히시고, 밤마다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다윗은 항상 자기 앞에 모시며 살겠다고 결단합니다(시 16:8 상).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오른편에 계시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시 16:8 하). ‘하나님께서 오른편에 계신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의 마음은 기뻤으며, 영혼도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자기 육체도 안전히 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스올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에 이르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시 16:10). ‘스올’은 구약 성경에서 죽은 자들이 가는 곳, 곧 죽음을 상징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인용했습니다(행 2:25-29; 13:35).

마지막으로 다윗은 미래에 있을 영원한 생명과 즐거움을 소망하며 이 시를 마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생명의 길’이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 곧 구원의 길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장차 있을 부활과 영원한 삶을 내다보며 이 표현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영원한 즐거움’ 또한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부활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될 완전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입니다(계 21:2). 그날이 오기 전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 즉시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만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참된 행복도, 참된 소망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인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환난 날에 우리를 보호하시며, 고통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그리고 후에 우리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