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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202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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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16절 ~ 21절 [개역개정]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설교문 보기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전파한 것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롬 10:8). 이는 복음, 즉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과 마음처럼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만한 때이고,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그러면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바울은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고(롬 10:9 상),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것입니다(롬 10:9 하).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믿음의 말씀이 입과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다시 같은 단어를 언급합니다. 8절의 입과 마음은 복음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또 쉽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반면, 9절은 그 복음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의에 이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 10:10). 그런데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헬라어로 주는 ‘퀴리오스’인데, 이 단어는 당시 주인이나 선생, 아버지, 남편 등 권위를 지닌 사람들을 가리킬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호칭이었습니다(마 8:6; 10:24; 벧전 3:6). 예를 들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어떤 헬라 사람들이 빌립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요 12:21). 여기서 ‘선생’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퀴리오스(문장에서는 호격인 퀴리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어떠한 고난이나 박해,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주후 56~57년경 바울이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54-68)였고, 그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황제 숭배가 점차 제도화되어 자리를 잡아가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황제 숭배’란 황제를 신격화하여 섬기는 행위를 말하며, 로마 제국 곳곳에는 이를 위한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방문하셨던 가이사랴 빌립보에도 헤롯 대왕이 세운 황제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도시는 우상숭배의 중심지라고 할 만큼 이방 신전들이 즐비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하거나, 선지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마 16:14).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뭇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시기에(요 2:23; 행 1:24) 제자들의 생각 역시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입으로 고백하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마 16:16). 이는 예수님께서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곧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며, 또한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은 로마 제국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들 역시 세상의 구원자이자 신으로 숭배되었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주’는 곧 황제를 의미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사실상 황제에 대한 반역 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라는 것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그로 인해 겪게 될 어떤 고난도 감수하겠다는 결단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단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을 때 즉 참된 믿음을 가질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참된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 없이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참된 믿음을 가질 때에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사 28:16). 여기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롬 10:12). 이는 주님께서 그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넉넉히 베풀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누구든지 차별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욜 2:3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롬 10:13).

바울은 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질문 형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 15 상) 복음은 누군가 전해 주지 않으면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면 믿을 수 없으며, 믿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를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하지만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 역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롬 11:13; 갈 2:8). 그런데 바울이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는, 단지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과정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는 16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롬 10:16 상). 유대인들은 분명 복음을 들었습니다(롬 10:18). 왜냐하면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시 19:4; 롬10:18). 하지만 그들은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은 것입니다(히 4:2). 이처럼 유대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복음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들었음에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대인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대부분의 1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 대부분이 복음을 거부했지만, 그중에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구원에 이른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곧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며(롬 1:7),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입니다(고전 15:18).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일입니다. 모세는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롬 10:19; 신 32:21). 이는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통해 그들을 시기하고 분노하게 만들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기와 분노를 느끼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롬 10:20) 이는 이사야 65장 1절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게 말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던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렀는데(롬 9:30),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에서 멀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외면하시거나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사야서(사 65:2)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롬 10:21) 여기서 ‘종일 손을 벌렸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오래 참고 기다리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고, 그분의 기다리심을 외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것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새끼들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새끼들이 어미의 날개 아래 있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려고 하셨고, 종일 손을 벌려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간절한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고, 결국 구원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고,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롬 10:2). 한 마디로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셨고, 지금도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이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딛 3:4; 벧후 3:9).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나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더 이상 회개의 기회는 없습니다(벧후 3:10).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들이 늦기 전에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