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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2025.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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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25절 ~ 32절 [개역개정]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문 보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 3:20-22).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 의를 세우려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롬 10:3). 그 결과, 유대인들은 구원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롬 11:11).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사 65:2; 롬 10:21). 그래서 진리의 말씀인 복음이 먼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백성, 곧 유대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행 13:46; 롬 1:16). 만일 그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될 것입니다(롬 11:23).

이러한 일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있으며(암 9:11; 호 3:5), 성령강림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행 2:41; 행 15:14). 그런데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 혹은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슥 12:10). 바울은 이를 ‘신비’라고 말하며, 그 신비에 대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입니다(롬 11:25). ‘신비’란 헬라어로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감추어진 것’ 즉 ‘비밀’을 뜻하며, ‘입을 다물다’를 의미하는 동사 ‘뮈오(μύω)’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 사회에는 비밀스러운 의식과 교리를 가진 종교 집단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종교의식을 거행하며,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이러한 집단을 가리켜 헬라어로 ‘뮈스테리아(μυστήρια, 密敎)’라 불렀으며, 여기서 영어의 ‘미스터리(mystery)’가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회복이 밀교에서처럼 은밀하게 감추어진 교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구속사의 일부임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이 신비를 알기 원한다고 했습니다(롬 11:25).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되었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때까지’를 뜻합니다(마 24:14). 그제야 비로소 세상이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되었다’라는 말은 ‘이스라엘 가운데 일부가 완악해졌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부가 아니라 대다수가 복음을 거부할 정도로 완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마 22:14). 그럼에도 ‘일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롬 11:5). 예수님의 말씀처럼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행 1:8),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마 24:36),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롬 11:26 상).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구원은 혈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비록 적은 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때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유대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 또한 구약에서 예언된 일입니다.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6 하) 바울이 인용한 성경은 이사야 59장 20절과 21절에 기록된 말씀을 요약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20절에서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신다’라고 했습니다(롬 11:26 상). 여기서 시온은 예루살렘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원자’는 히브리어로 ‘고엘(גּוֹאֵל)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무르다, 되찾다, 구속하다’ 혹은 ‘보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가알(גָּאַל)’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나서서 그 일을 대신 해결하도록 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죽임을 당하면 그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 살해자를 찾아 복수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 ‘고엘’을 ‘복수할 자’(민 35:12) 혹은 ‘원수 갚는 자’(삼하 14:11)라 불렀습니다. 또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기업을 다시 사주어야 했고(레 25:25, 26), 종으로 팔렸을 경우 속량 곧 몸값을 치르고 그를 되찾아와야 했습니다(레 25:47-49). 이처럼 ‘고엘’은 어려움을 당한 친족에게는 구속자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후에 이 단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시 19:14 ; 잠 23:11 등), 이사야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속량 하시기 위해 그 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우리의 ‘고엘’, 곧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의 공로로 인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롬 8:2).

이사야는 같은 절에서 구원자가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언급합니다(롬 11:26 하). 여기서 야곱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이는 구원자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악과 불의를 제거하시고 회복시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이사야서는 구속자가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고 표현했습니다(사 59:20). 자기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악과 불의를 제거하시고 온전히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들, 곧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란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사야 59장에 이어 27장 9절의 말씀도 인용합니다.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롬 11:27)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질 ‘새 언약’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이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 곧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증하시는 분으로서(히 7:22), 구원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되십니다(요 14:6). 따라서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롬 11:28). 여기서 ‘복음’과 ‘택하심’ 그리고 ‘원수 된 자’와 ‘사랑을 입은 자’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곧 이스라엘의 이중적인 위치를 보여줍니다. 즉, 그들은 복음을 거부하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들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거부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롬 11:29). ‘후회하심이 없다’라는 말은 ‘변함이 없다’ 또는 ‘취소될 수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부르심은 어떤 경우에도 철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언약의 불변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도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믿으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구원에서 멀어진 상태로 있다가(롬 11:23),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살후 1:9).

그런데, 바울은 32절에서 그들이 불순종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롬 11:32 상). 과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순종을 허용하시고 그 상태에 내버려두셨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은 불순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만이 불순종의 상태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롬 11:32 하). 지난번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 예화를 통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구명 튜브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는 이 튜브를 붙잡기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이 구명 튜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물에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 에베소서 2장 4절과 5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여기서 긍휼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 가운데 있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마음을 의미하고, 은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가리킵니다. 또 구명 튜브를 붙잡는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라는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만약 그 튜브를 붙잡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물에 빠져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벧 3:9). 그래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계시지만,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히 4: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죄악과 불의를 깨닫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끊임없이 말씀을 가르치시며 선포하셨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눅 13:34).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뿐 그것을 억지로 여시지는 않습니다. 이는 구원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고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거든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히 3:15),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히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