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이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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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12절 ~ 21절 [개역개정]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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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으로, 바울은 그런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 곧 합당한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지난 시간에 이어 거룩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 곧 장차 성도들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고전 15:51)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그날을 바라보며 기대하는 것입니다(롬 5:2). 그러한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롬 5:3). 하지만 세상의 유혹이 계속되고 환난이 거세지면 소망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소망을 굳게 붙잡도록 해주는 힘이 바로 기도입니다. 소망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면, 기도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에 항상 힘쓸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롬 12:12).
2.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초대 기독교는 불법적인 집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이유로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경우도 많았고, 감옥에 갇히는 일도 흔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기에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이 절실했습니다. 여기서 ‘공급하다’라는 말은 ‘나누다’(롬 15:27) 혹은 ‘함께 하다’(갈 6:6)라는 의미로, 단순히 어려운 성도를 돕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라는 권면입니다. 성도 간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은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또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일반 나그네와 달리 숙식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돕다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손님 대접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서로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듯, 성도가 서로를 돌아보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히 10:24). 그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처럼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게 될 수도 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히 13:2). 이는 나그네를 대접함으로 얻게 될 유익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자,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할 사랑의 실천임을 일깨워 주려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할 때 유의할 점은 서로 원망 없이 즉 불평 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벧전 4:9).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힘에 겨울 수도 있었고,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불평이 나올 수도 있었지만, 성도는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단순히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곧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25:35, 40). 또한, 자신도 언제든지 나그네의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 비록 어렵고 부담스러울지라도 불평 없이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축복과 저주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축복’은 상대가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것이고, ‘저주’는 불행이 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저주의 말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마 5:44; 눅 6:28). 그러나 원수를 축복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원수가 행복하기를, 그것도 진심으로 기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벧전 3:9).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는 더 이상 육체의 본성에 따라 사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능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만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갈 5: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성품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벧전 2:9). 따라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요일 4: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죄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롬 5:10).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신 확실한 사건이었습니다(롬 5:8).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를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할 때 세상은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며(마 5:16), 동시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됩니다.
4.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슬픔 중에 있을지라도 누군가 즐거워하는 자가 있다면 그 즐거움을 함께해야 하며, 반대로 나에게 기쁜 일이 있더라도 슬퍼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슬픔에 동참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이는 단순히 그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여기고 함께 감당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면에서 13절과 같은 맥락의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 간에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때 기쁨은 더욱 커지고, 슬픔은 치유될 것입니다.
5.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성도 간의 겸손과 일치를 강조하는 권면입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한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빌 2:2).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거나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는 것, 즉 교만은 마음을 같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교만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일어날 뿐이지만(잠 13:10), 겸손이 있는 곳에는 화평과 일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에게(막 9:34)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겸손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요 13:14). 바울 역시 교만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난 빌립보 교회에,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빌 2:5). 우리 교회도 주님 안에서 서로 같은 마음을 품고, 겸손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6.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대부분 죄를 지은 자에게 동일한 형벌을 내렸습니다(출 21:23-25).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니 이는 세상 사람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다시 한번 그 말씀을 보겠습니다, 벧전 3:9). 한마디로, 성도는 빛과 어둠처럼 세상과는 구별된 존재이며(고후 6:14), 그 삶의 방식 또한 세상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성도는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함으로 성도로서 본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성도라면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마 5:16). 자녀가 잘못하면 부모가 욕을 먹는 것처럼, 우리가 성도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모독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롬 2:24).
7.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이란 말은 화평이란 말과 동의어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언제나 화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히 12:14). 물론, ‘할 수 있거든’이라는 조건절이 붙은 것처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는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롬 12:18). 하지만 이것이 화평을 위해 불의와 타협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불의와는 결코 타협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성도는 이 땅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따라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8.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해야 합니다.
19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롬 12:19 하). 우리가 원수에게 해야 할 일은 복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눅 6:27). 그래서 바울은 잠언(25:21)을 인용하며,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롬 12:20 상). 원수가 어려움을 겪을 때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역시 잠언(25:22)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하)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는다’는 것은 우리가 원수에게 은혜를 베풀 때,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기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결국 회개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원수에게 그가 행한 대로 되갚으면 상대방은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더 큰 분노로 맞서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 오히려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마침내 회개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1절에서 말하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통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