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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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18절 ~ 25절 [개역개정]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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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곧 사랑을 실천하고 정결을 지키며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에게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대상자를 특정하지 않고 단순히 ‘수신자들’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히브리서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또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바울이 히브리인들, 곧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요청한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히 13:18 전) 여기서 ‘우리’는 일인칭 복수형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히브리서 기자와 그의 동역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서간체 즉 편지 형식의 글에서는 자신을 가리켜 종종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즉, 편지를 쓰는 사람이 단순히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의 뜻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19절에는 일인칭 단수형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의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 개인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했고, 그 근거로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한다”라고 했습니다(히 13:18 하). 여기서 ‘선하게 행하려 한다’라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에, 자신이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기 마련입니다(눅 6:45). 따라서 악한 양심을 가진 자는 악을 행하려 하지만,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선을 행하려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선한 양심을 지녔기에, 모든 일에 있어서 선하게 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삶을 수신자들에게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역자들 또한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고, 사실상 부탁이 아닌 명령에 가까운 요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과 동역자들이 그런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도의 영혼을 위해 늘 기도하며, 마치 자신이 그 영혼에 대해 책임져야 할 사람인 것처럼, 그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히 13:17). 그러므로 성도들 역시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그래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른 지체들도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고전 12:26). 이렇게 성도가 한 몸으로서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주님의 몸 된 교회(골 1:24)는 더욱 든든히 세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성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한다”라고 했습니다(히 13:19). 이는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라 디모데와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히 13:23). 그것이 여러 면에서 공동체에 더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보건대, 히브리서 기자는 디모데와 가까운 동역자였으며, 수신자들 또한 디모데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디모데는 감옥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루라도 빨리 수신자들을 만나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로, 동족인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를 피하려고 믿음에서 떠나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편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히브리서 기자는, 직접 가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속히’와 ‘더욱’이라는 표현은, 그가 수신자들을 얼마나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그의 바람은 수신자들을 향한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 21) 여기서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가스(μέγας)’는 양이 많거나, 능력이 탁월하거나, 지위나 명성이 높을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통신 분야에서 데이터의 양을 나타내는 단위인 ‘메가(mega)’는 이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4장에서는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이라 칭했습니다(히 4:14 상). 대제사장은 제사장의 수장으로 백성을 대표하고 예배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지휘, 감독했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 앞에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예수님이 아론 지파의 대제사장들보다 더 우월하신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들뿐 아니라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히 4:14 하). 그리고 본문 20절에서는 예수님을 ‘양들의 큰 목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관련이 있습니다.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사 63:11)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여기서 ‘목자’는 모세를 가리킵니다. 그는 주의 백성인 ‘양 떼’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시 77:20).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이라 칭한 것처럼, 목자 앞에도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양들의 큰 목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갈 3:19)보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히 8:16)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장에서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모세보다 예수님께서 훨씬 더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는 3절에서 예수님과 모세를 집을 지은 자와 그 집에 비유했습니다. 즉, 모세가 집이라면 예수님은 그 집을 지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히 3:4). 이처럼 예수님과 모세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있으며, 서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하였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실했습니다(히 3:5, 6). 종과 아들은 그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우월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예수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수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1:35).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고 확실히 알아야만 합니다. 이는 신앙의 기초와 같은 것으로, 그 기초가 튼튼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에게 복을 구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힙니다. 그분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히 13:20). 여기서 말하는 ‘언약의 피’는 스가랴의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슥 9:11). 이는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관한 약속으로,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질 영원한 구속을 예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희생 제사였습니다(히 9:20; 출 24:8).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마 26:28).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실 영원한 속죄와 영생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고, 오직 영원한 생명만이 있습니다(요 3:16).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평강’은 헬라어로 ‘에이레네(εἰρήνη)’인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 성경에서는 평화, 화평, 화목, 화친, 안전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이 호칭은 본문 20절과 바울서신(롬 15:33; 16:20; 고후 13:11; 빌 4:19; 살전 5:23)에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까요? 17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에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들과 성도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나 불화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성도들이 갈등과 불화를 멈추고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힘쓰도록 권면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수신자들을 위해 구한 복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대부분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로, 동족인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신앙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사람의 힘으로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의 신앙을 온전하게 하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둘째,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그 앞에 즐거운 것’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은 당시 흔히 쓰이던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 꼭 필요한 기원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히 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죄 때문에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졌습니다(롬 5:1).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과의 화평을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당시 성도들은 배교의 위험과 기타 문제들로 인해 서로 화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평강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도 서로 화평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서로 갈등을 일으키거나 불화하지 말고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히 12:14).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해야 합니다. 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고전 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