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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2025.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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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11절 ~ 14절 [개역개정]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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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 재림에 관한 약속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요 14:3). 그리고 부활 후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그 약속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과 그때는 모릅니다(마 24:36). 성경이 그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롬 13:11 상). 여기서 ‘시기’는 헬라어로 ‘카이로스’라 하는데, 이는 정해진 시간이나 특정한 시대를 의미합니다(마 16:3; 막 1:15; 요 7:6). 그리고 ‘때’로 번역된 헬라어 ‘호라’는 시간 속의 어느 한 시점을 가리킵니다(막 23:32). 두 단어는 모두 특정한 때 곧 재림과 관계가 있습니다. 비록 그날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는 구원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빌 2:12). 바울은 그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고 말합니다(롬 13:11 하).

그러나 바울이 이 말을 한 이후로 거의 2,0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재림의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깰 때가 벌써 되었다’라고 한 바울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고린도후서 6장 2절의 말씀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만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그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이며, 동시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은 언제든지 임할 수 있으므로,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늘 현재의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는 이러한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정혼(약혼)한 지 1년이 되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은 신랑 집이나 신랑 측이 마련한 장소에서 치러지는데(마 22:2; 요 2:9),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오면 비로소 잔치가 시작됩니다. 이때 신랑 일행을 맞이하여 잔치가 열리는 장소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입니다(마 25:1).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오는 시간은 대개 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등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지자 열 처녀는 기다리다 지쳐 졸다가 결국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이 되어 누군가 “신랑이 오니 맞으러 나오라”고 외치자, 잠에서 깨어난 열 처녀는 각자 자기 등을 챙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등불이 없으면 그들은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맡은 역할이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여 잔치가 벌어지는 장소까지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몰라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입니다. 반면에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을 슬기 있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은 기름을 준비한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슬기 있는 자들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며 "차라리 기름을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했습니다. 같이 쓰기에는 기름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정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그들에게는 신랑을 맞이하는 일이 사사로운 정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들의 처사는 정당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왔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기름을 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사 구했더라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자 안에서 들려온 것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사실, 신랑이 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늦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슬기 있는 처녀들은 이에 대비해서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미려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안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못했다는 것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만, 안 했다는 것은 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예수님이 그들을 미려한 자들이라고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신랑을 맞이하는 일을 안일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열 처녀가 준비해야 했던 등과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등은 그리스도인들의 외적인 삶을, 기름은 내적인 믿음 혹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마 25:3)라는 것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등과 기름을 굳이 비유적으로 해석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등과 기름이 무엇을 가리키든 이 비유의 핵심은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마 25:13). 만약 도둑이 언제 들어올지 알았다면 집주인은 깨어 있을 것이고 그래서 도둑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을 것입니다(마 24:43). 재림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은 도둑같이(벧후 3:10) 그리고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같이 갑자기 이를 것입니다(살전 5:2, 3). 따라서 그날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마 24:44).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밤과 낮, 어둠과 빛은 서로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둠’은 종종 죄와 불순종을 상징하며, 바울은 이것을 ‘어둠의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13절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 여기서 ‘방탕’과 ‘술 취함’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방탕’으로 번역된 헬라어 ‘코모스(κῶμος)’는 고대 축제일에 사람들이 술에 취해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며 흥청거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한 ‘음란’과 ‘호색’은 당시 사회에서 마치 관습처럼 여겨질 정도로 일상적인 문화였으며, 특히 로마에서는 그 정도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인데, 바울이 로마서 서두(롬 1:26-27)에서 이를 언급한 것도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툼과 시기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약의 서신서 대부분에서 다툼과 시기에 대해 언급한 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고린도 교회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시기와 다툼이 심각했습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한다”(고전 3:3)라고 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어둠의 일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단정히 행하는 것’은 ‘품위 있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 시민으로서, 그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특별히 ‘갑옷’이라 표현한 것은, 그런 삶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갑옷은 전쟁에서 적의 창과 화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던 옷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철로 된 갑옷을 입었습니다. 조금 무겁고 불편하긴 했지만,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될 장비였습니다. 성도들 역시 어두움의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악한 영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엡 6:12).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롬 13:14 상). 성경에서 ‘누구를 옷 입는다’라는 표현은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롬 13:14 하). ‘정욕’이란 앞서 언급한 ‘어둠의 일들’을 가리키며, ‘도모한다’는 것은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둠의 일들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결국 육신의 정욕을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나 할 일이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니며 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위해 애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고, 혼인 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 22:11). 그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마 22:12). 우리 모두 슬기 있는 다섯 처녀처럼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하고 있다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