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경본문 보기
시편 22편 1절 ~ 19절 [개역개정]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설교문 보기
시편 22편은 표제에 있는 대로 다윗이 지은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이 고난 중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내용 중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여럿 나옵니다. 따라서, 본 시편은 다윗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지어진 시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본 시편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교훈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절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말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여섯 시간쯤 되어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마 27:46). 이는 아람어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아람어는 당시 헬라어와 더불어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언어였습니다(막 5: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고전 15:3). 죄의 대가는 죽음이고(롬 6:23),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히 9:2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사 53:12)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것입니다(롬 4:25).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사 59:2).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롬 5:10),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일반적으로 저주(갈 3:13)와 수치(히 12:2)의 상징이지만, 버림받음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버림받았음을 의미합니다(사 53:3).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음의 고통이 어떠한지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버림받아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었고(롬 5:10),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롬 5:1; 엡 2:1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도 서로 화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라고 표현했습니다(엡 2:14).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단절 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부정한 자로 여기고, 그들과의 교류를 철저히 금했습니다(행 10:28; 갈 2:12). 물론, 이방인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서약하면 유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과는 교제할 수 없었고, 성전 출입에도 제한을 받았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구역이 있었는데, 이는 솔로몬 성전이나 스룹바벨 성전에는 없던 공간입니다. 이는 헤롯이 이방인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방인의 환심을 얻으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 외에도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의 뜰과 유대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 그리고 유대인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여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담이 있어서, 이방인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와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담으로 구분 지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간에 막힌 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서로 원수가 되게 했던 담을 허무셔서,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고 오직 하나의 새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엡 2:15).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권면처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롬 12:18). 그리스도인들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사이에서도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게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타협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 수 있으면’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도록 힘쓰되 타협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시 22:2). 그때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며 조롱했습니다(시 22:7). 그들은 입술을 삐죽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했습니다(시 22:8). “‘너는 여호와를 신뢰하던 자가 아니냐? 그런데 어째서 그가 너를 구원하지 않느냐? 만일 여호와가 너를 좋아하신다면 어째서 너를 돕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이 보인 행동과 같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했습니다(마 27:39, 41).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3)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 조롱하며 멸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사람인지라 순간적으로 화가 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베드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라고 했습니다(벧전 2:19). 선을 행하다 억울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 뿐만 아니라(벧전 3:17),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를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벧전 2:21).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것은 단지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 곧 그분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으셨습니다(롬 12:2; 엡 2:10).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고전 10:31).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이자, 삶의 목적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지를,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사자에 비유했습니다.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시 22:13). 사자는 잔인하고 포악한 짐승으로(렘 2:15), 이는 대적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위협적인 존재인지를 실감 나게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자를 마귀에 비유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마귀는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아 헤매듯, 성도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마귀는 자신의 운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결코 이러한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 믿음에 굳게 서있어야 합니다(고전 16:13).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사자 못지않게 위험한 동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들개’입니다. 들개는 보통 무리를 지어 성 안팎을 돌아다니며(시 59:6), 썩은 고기나 시체 등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어 치웠습니다(왕상 14:11; 왕하 9:36).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도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대적들을 이런 들개에 비유하여, 그들이 얼마나 사납고 위협적인 존재인지를 드러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시 22:16) 여기서 ‘내 수족 곧 손과 발을 찔렀다’라는 표현은 다윗이 당한 극심한 고통을 보여 주는 동시에, 장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히시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말씀입니다(눅 24:39).
이어지는 18절 역시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그의 옷을 네 몫으로 나누어 각각 하나씩 가졌습니다(요 19:23). 이는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보통 착용하던 네 가지 복장, 곧 머리에 두르는 수건과 신발, 허리띠, 겉옷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통으로 짠 것이었기 때문에, 찢지 않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갖도록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요 19:24). 옷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소유이며, 한 사람의 인격을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마저도 모두 빼앗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종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으셨습니다. 바로 그 희생과 낮아지심으로 인해 오늘 우리가 구원받아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잊지 말고, 그분을 본받아 날마다 겸손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지신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대신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짊어지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빌립보서 2:9–10). 이 놀라운 사실을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미리 내다보며 예언을 했습니다. 그 내용이 2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곤고함에 처할 때 결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시 22:24). 지금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며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며, 앞으로도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을 믿으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