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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2025. 10. 6.
성경본문 보기

요한일서 1장 1절 ~ 10절 [개역개정]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를 사랑하셨지만(요 13:1) 그중에서도 특별히 사랑하시는 제자가 있었습니다(요 21:20, 24). 바로 세베대의 아들 요한입니다(마 10:2).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에 이르기까지 항상 주님과 함께한 제자입니다. 요한일서는 그가 기록한 다섯 권의 성경 가운데 하나로, 그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요일 5:13).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안팎으로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파괴되었으며, 사도들은 대부분 순교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였던 도미티안은 자신을 ‘주와 하나님’이라 부르게 하며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교회 내부로는 영지주의 이단이 침투하여 공동체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혹은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선하지만, 물질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은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금욕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쾌락주의자들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육체가 악하기 때문에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영혼을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금하고 주로 채소만 먹도록 강요하였습니다(딤전 4:3; 롬 14:2). 반면 쾌락주의자들은 악한 육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으로써 육체로부터 해방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을 따라 무엇이든지 먹고 마셨으며, 성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딤후 3:6; 벧후 2:18; 유 1:4). 그러면서도 영혼과 육체는 서로 관계가 없으니 어떤 죄를 짓든 영혼의 구원에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니골라 당의 행위(계 2:6)와 두아디라 교회의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계 2:20), 그리고 버가모 교회의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계 2:14–15)은 이러한 영지주의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요한은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지 말고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요일 2:24 상).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며, 그 복음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 2:24 하). 다시 말해, 우리가 복음 안에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요일 2:25). 이는 ‘복음 안에 거하지 않으면 영생에 이를 수 없다’라는 경고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어떤 미혹에도 흔들림 없이 살아가라는 격려입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영생이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7:3). 하나님께서는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요 3:16). 따라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은 본문 1절에서 예수님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계셨다는 의미로,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요 1:1). 여기서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고스’는 ‘본래 ‘말’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단어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단어를 특별히 예수님을 지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당시 이방 문화에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로고스’를 만물의 근원으로 이해했고, 유대 전통에서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으로 받아들였습니다(시 33:6; 히 11:3). 요한은 이러한 개념에 익숙했던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곧 만물의 근원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복음서와 달리 단순히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라 표현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시며(요 14:6),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의미합니다(요 1:4). 요한은 그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합니다(요일 1:1).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2절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요한이 편지의 서두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강조한 것은, 당시 교회 안에 퍼져 있던 영지주의 가르침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했습니다(요이 1:7). 왜냐하면 선하신 분이 악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살과 뼈(눅 24:39) 그리고 물과 피(요일 5:6)가 있는 실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빌 2:7). 그래서 사람처럼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고(눅 2:52), 인간의 감정과 연약함, 즉 배고픔(마 4:2), 피곤함(요 4:6), 슬픔(요 11:35), 괴로움(마 26:38), 시험(히 2:18 ; 4:15) 그리고 죽음(눅 23:46 ; 히 9:27)까지 모두 경험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심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의 부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육체는 죽음과 함께 썩어 없어지고, 선한 영혼만이 살아남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고전 15:2 상), 요한을 비롯한 열 두 사도와 오백 여 형제들이 실제로 그분을 뵈었습니다(고전 15:5-6).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라”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행 2:32; 3:15).

그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롬 1:3) 여기서 '사귐'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데, 이는 ‘나눔’ 또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는 성도 간의 친교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도 포함합니다(요일 1:6).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영적 존재인 천사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교제할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결과, 천사들을 중보자로 섬기며 숭배하는 잘못에 빠졌습니다(골 2:18).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뿐이십니다(딤전 2:5).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으며(요 14:6), 그 교제 안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요일 1:4). 그래서 기쁨[희락]은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갈 5:22).

그런데, 당시 교회 안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어둠에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죄악을 행하는 상태, 곧 악을 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영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육체의 행위는 중요하지 않으며, 어떤 일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요일 1:6). 빛과 어둠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기에 결코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고후 6:14). 그러므로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는 자는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반드시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요일 1:7). 이는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죄를 멀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을 ‘빛의 열매’로 표현하며, 그것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말했습니다(엡 5:9). 즉,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멀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의를 따르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로서의 마땅한 모습입니다(벧전 2:12).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죄의 성품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육신에 속한 자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바울 역시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롬 7:19). 그럼에도 영지주의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된 자들은 어둠 속에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입니다(요일 1:10). 다윗은 죄를 지은 후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그 죄를 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삼하 24:10 ; 대상 21:8). 또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문구가 나옵니다(마 6:12 ; 눅 11:4).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목욕한 자도 발은 씻어야 하듯, 중생한 사람도 매일의 삶 속에서 짓는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요일 1:9). 이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거짓 성도와 참된 성도의 차이는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죄를 지은 후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 3:16; 요일 2:25). 그 약속에 따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교제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지 말고,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마 5:16). 그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제일된 목적이기도 합니다(고전 10:31). 우리 모두 날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