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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202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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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26절 ~ 31절 [개역개정]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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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성도 간의 일치, 곧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고전 1:10). 이어서 그는 “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권면했습니다(고전 1:26 상).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자신들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델포이라는 도시에 아폴론 신전이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기둥 몇 개만이 남아있습니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이 신전 현관 기둥에 그리스 말로 ‘그노티 사우톤(γνῶθι σεαυτόν)’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인데, 흔히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가 이 글귀를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본명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새 이름입니다. 그의 본명은 ‘시몬’으로,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습니다(마 4:18).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살고 있는 마을에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근처에 두 척의 배가 있는 것을 보시고 그중 하나에 오르셨는데, 그 배는 바로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 놓기를 청하신 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부들에게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기를 잡는데 알맞은 시간과 장소가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정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고기는 주로 밤에 잡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전날 밤에 나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아침이 되자 해변가로 나와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고기는 대게 적당한 깊이에서 많이 잡힙니다. 때문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해본 어부라면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고기를 잡기 위해 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사건 직후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이러한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아니니 회개할 이유도,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인이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의인이 아니면 죄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롬 3:10).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하든 안 하든,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롬 3:23).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행 3:19).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2). 고린도 교인들이 구원받은 것은 그들의 공로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엡 2:8).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기 전 모두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잘났다고 다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2. 비천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나 권력 혹은 가문 좋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고전 1:26)한 마디로 그들은 비천한 자, 곧 지위나 신분이 낮고 천한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고린도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롬 16:23)처럼 고위직 관료나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천한 신분이었고, 심지어 노예들도 많았습니다(고전 7:21).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의 노예는 한낱 물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법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없었고, 보상이란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인격은 철저히 무시되었으며, 오로지 주인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자들과 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있는 자들을 없게 하셨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입니다(고전 1:27-29).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지혜와 권세가 아름답고 가치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배설물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아덴에서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자 그곳에 있던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그를 ‘말쟁이’라며 조롱했습니다(행 17:18, 32). 에피쿠로스학파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의 입장을 취했고, 스토아학파는 모든 만물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학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로소포스(φιλόσοφος)’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란 뜻입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지혜를 중시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겼지만, 그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었고,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지혜는 진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철학을 헛된 속임수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철학이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기 때문입니다(골 2:8). ‘초등학문’이란 ‘어떤 분야에 있어서 초보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히 5:12), 유대인의 전통이나 이방인의 철학처럼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모든 사상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장로들의 전통(막 7:3), 곧 조상들의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 두 가지라고 믿습니다. 하나는 '성문율법' 즉 글로 기록된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이고, 또 하나는 모세가 직접 장로들에게 말로 전해준 '구전율법'입니다. 장로들의 전통 혹은 조상들의 전통이 바로 이 구전율법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가관들은 성문법인 토라보다 장로들의 전통을 더 중요시했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며 책망하셨습니다(막 7:8). 또 바울은 율법을 ‘초등학문’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갈 4:9).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초등학문은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초등학문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철학이나 이방종교, 미신 등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지혜를 앞세우는 사상을 의미합니다(골 2:20). 반면, 바울이 율법을 초등학문이라 부른 것은 그 자체가 세속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해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주어진 것으로(갈 3:19),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롬 3:20).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비롯해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지혜와 권세로는 결코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율법이나 유대인의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 곧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복음(고전 1:23)을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고전 1:21).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실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으며(고전 1:2), 성령께서 그들에게 은사를 주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어떻게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풍족할 수 있었었겠습니까(고전 1:5). 지금 그들에게 신분과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그들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 1:31). 바울이 인용한 성경은 예레미야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요시야 때부터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유다는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으로 외형상 신앙의 회복을 이룬 듯 보였으나, 도덕적으로는 여전히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렘 9:2–6).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알려고 하거나 의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지혜와 권세, 재물을 의지하며 스스로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렘 9:23-24) 이 말씀은 인간의 지혜나 권세, 재물을 자랑하는 것이 헛된 일임을 밝히며, 오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참된 자랑임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지혜와 권세, 재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거나 자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로 인해 공동체가 분열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처럼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겸손해질 수 있고, 그래야 분쟁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겸손과 사랑으로 공동체를 세워 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