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행하신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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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절 ~ 11절 [개역개정]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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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신자들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요일 2:1 상) 요한일서를 썼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입니다(엡 2:10). 하지만 이러한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롬 6:7),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성품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오랜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이라도 육신에 속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바울 역시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괴로워했습니다(롬 7:19). 이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대언자,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요일 2:1 하). ‘대언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란 뜻으로, 당시 법정에서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사람, 곧 변호인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단어가 ‘보혜사’로 번역되었습니다(요 14:16).
또한 요한이 예수님을 ‘의로우신’ 분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실 자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에서 변호사를 하려면 먼저 로스쿨이라고 하는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뒤, 대한변호사협회에 등록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을 모두 갖추어야 법정에서 변론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론하는 데에도 자격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 하나,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이 의로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분만이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히 4:15).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딤전 2:5),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실 수 있습니다(롬 8:34).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성도를 위해 변호하시는 걸까요? 이 ‘근거’는 법정에서 제시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변호의 효력이 있으려면 그 근거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과 교제를 위해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사람은 아담이 죄를 지은 이래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롬 5:10). 하지만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과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사람을 하나님과 원수 관계로 만든 것이 바로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롬 3:23).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롬 3:25 ; 5:10 ; 골 1:22 ; 요일 4:10). 그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롬 5:10 ; 고후 5:18 ; 골 1: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행 10:43)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행 13:39)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그분을 믿는 것 외에는 죄인이 구원 얻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행 4:12).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2).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완전하고 영원한 대가를 십자가에서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근거로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죄를 지을 때 그들의 변호인으로서 만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히 12:23) 앞에서 간구하고 계십니다(롬 8:34).
또한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십니다(롬 8:26). 그러나 이는 성령이 성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의 도우심은 기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요일 2:2 하). 이는 곧 구원의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인종과 신분의 차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갈 3:28).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요한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했습니다(요일 2:3). '그를 안다는 것’은 곧 ‘그를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요 17:3),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요 3:16). 그런데 “그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라고 요한은 말합니다(요일 2: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다고 하면서도 그의 계명,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찔레에서 포도를 딸 수는 없습니다(눅 6:44). 또한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약 3:12). 나무는 그 종류에 따라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단지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마 7:21).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에 합당한 열매로 증명이 됩니다(행 26:20). 이것이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약 2:18).
이처럼 요한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행위를 함께 언급한 것은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 사상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지(계 22:24 )’란 헬라어 그노시스(γνῶσις)에서 유래한 말로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지식, 곧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구원받은 영혼은 육체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은 철학이나 사람의 전통처럼 세상에 기초한 것으로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골 2:8). 그럼에도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았습니다. 그 한 예로, 계시록에 나오는 두아디라 교회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두아디라는 상공업도시였으며, 업종별로 ‘길드’라고 하는 상인 조합이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조합에 가입해야만 시민으로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즉, 합법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고, 사회적 신분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합들은 각자의 업종이나 전통에 맞는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청동세공업 조합은 불과 금속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헤파이스토스(Hephaestus)를 섬겼고, 많은 조합이 도시의 주신인 트림나스(Tyrimnos)를 숭배했습니다. 따라서 조합원들은 반드시 이 신전의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기에, 두아디라 교인들은 신앙을 지켜야 할지 아니면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신전 의식에 참여해야 할지를 두고 심각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때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이 등장하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관계가 없기에 몸으로 어떤 죄를 짓더라도 영혼의 구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이 미혹되어 신전 의식에 참여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되었습니다(계 2:20).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을 피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한 것입니다.
반면에, 이 교훈을 받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계 2:24).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온전하게 되며, 이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을 알게 됩니다(요일 2:5). 결국,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분께서 행하신 것같이 자신도 행해야 합니다(요일 2:6).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는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며(요 13:34), 율법의 핵심이기도 합니다(롬 13:9).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그와 같다’는 표현은, 첫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이 그 본질에 있어서 동등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이 두 계명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으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는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요일 2:9 상).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요일 1:5)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은 형제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가 빛 가운데 있는 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어둠에 속한 자였음을 드러냅니다(요일 2:9 하). 그는 어둠 속에 거하며 어둠 가운데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의 눈이 어둠에 가려져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요일 2:11). 그는 영적인 눈이 멀어 세상 사람들처럼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방향이나 목적, 기준)로 삼아야 하는데(시 119:105),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따르기 때문에 결국 멸망의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달리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므로 그 속에는 거리낌이 전혀 없습니다(요일 2:10). ‘거리낌’이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 시험에 빠질 일도 없고, 다른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시험을 전혀 받지 않거나 시험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처럼,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시험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비록 시험을 받을지라도 그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 15: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3:35).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서로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이 어떤지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서로 미워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고(롬 13:10), 베드로는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벧전 4:8). 사랑은 언제나 정죄 대신 용서를, 폭로 대신 덮음을, 분노 대신 화해를 지향합니다. 우리도 그가 행하신 대로 사랑을 실천함으로 온전히 하나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