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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자들과 육신에 속한 자들

2025. 11. 13.

 

성경본문 보기

고린도전서 3장 1절 ~ 9절 [개역개정]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설교문 보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고전 3:1). 여기서 말하는 ‘육신에 속한 자’는 앞선 2장에서 언급한 ‘육에 속한 자’와는 다릅니다(고전 2:14). ‘육에 속한(ψυχικός)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를 가리킵니다(유 1:19). 그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 아니라,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육에 속한 사람은 물질적인 것, 즉 눈에 보이는 것에 최고의 가치와 목적을 둡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며, 세상의 것들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갑니다(요일 2:16).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부도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보다 더 도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되는 이유는,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유 1:19). 따라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육에 속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반면, 육신에 속한(σαρκικός)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는 다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자, 곧 세상에 속한 사람이지만, 육신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는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첫째, 영적 어린아이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 부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여기서 ‘어린아이’란 순진하거나 악을 모르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다스릴 줄 모르는 미숙한 상태, 즉 어리석고 유치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성령으로 거듭났으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고, 여전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보다 시기하고 질투하기 쉽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교회 안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선하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이 당연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화평을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고 있음을 강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화평은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어야 할 삶의 열매이며(갈 5:22), 모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힘써 추구해야 할 덕목입니다(히 12:14). 그렇다고 화평을 위해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화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약 3:18).

둘째, 단단한 음식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했습니다(고전 3:2). 여기서 ‘젖’은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6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 세례,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등입니다(히 6:1-2). 그리고 ‘밥(헬, βρῶμα)’은 고기와 같은 단단한 음식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교회의 연합과 같은 복음의 성숙한 교훈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처음 복음을 접했을 때, 그들의 수준에 맞게 초보적인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5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여전히 신앙의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시기와 분쟁은 성령의 열매와는 정반대 되는 육체의 일입니다(갈 5:19-20). 따라서 그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곧 신앙의 열매가 그들의 삶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비단 고린도 교회만의 일은 아닙니다. 당시 교회들 역시 같은 문제를 겪었으며, 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교회들 대부분도 영적 미성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교회들의 문제는 성경의 다른 교훈들과 마찬가지로, 당시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에 적용되는 예언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고민해 보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란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신령한 자들’을 가리킵니다(고전 3:1).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 특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고전 2:16).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빌립보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한 마디로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마 11:29). 겸손이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라면, 온유는 그 낮은 마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드러나는 태도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람이 구약의 모세입니다. 성경은 모세를 가리켜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말합니다(민 12:3). 이는 모세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온유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온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나우(עָנָו)’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자기를 낮춤’ 혹은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모세를 ‘온유한 자’라고 했을까요?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신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구스’는 ‘검다’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오늘날 에디오피아 지역에 사는 민족을 가리킵니다(행 8:27). 본래 모세에게는 미디안 여인 십보라가 있었으나 그녀가 죽은 후 출애굽 당시 함께 나온 민족들(출 12:38) 가운데 구스 여자를 취하여 아내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에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그를 비난했습니다(민 12:1).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거주하던 일곱 족속과의 결혼만을 금하셨을 뿐(출 34:16; 신 7:1), 모든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하신 것은 아닙니다(창 41:50). 더욱이 구스 여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 함께 나왔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주셨습니다(출 12:49; 수 8:33). 그럼에도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 12:2) 그들 역시 백성의 지도자였지만, 동생인 모세가 자신들보다 더 높은 지위와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을 시기하여, 구스 여인과의 결혼을 구실 삼아 모세를 비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러한 비방에 대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방한 미리암이 하나님의 진노로 한센병에 걸리자, 그녀의 치유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민 12:13). 히브리어 원문에는 ‘원하건대’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어, 모세가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온유함입니다. 그러나 그의 온유함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백성들의 원망에 분노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민 20:12).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빌 2:8).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눅 23:34).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을 품는다면 시기와 그로 인한 분쟁은 사라질 것입니다.

둘째, 영적 분별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참과 거짓인지, 그리고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고전 2:13-14; 히 5:14). 영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별할 줄 압니다. 세상의 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지만, 그 일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임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갑니다. 반면 그들은 영적인 일에는 기꺼이 헌신합니다. 이와 달리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당을 짓고 서로 다투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에게 속해 있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에게 속해 있다” 말하며(고전 3:4), 서로 시기하고 다투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도대체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겨주신 대로 일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고전 3:5). 바울은 이를 심는 자와 물 주는 자에 비유합니다(고전 3:6). 즉, 바울은 복음의 씨앗을 심었고 그 결과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아볼로는 그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심는 사람인 바울이나 물 주는 사람인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신앙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 3:7). 그러므로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거나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하면서 그들을 따르거나 추종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을 맡은 동역자로서(고전 3:9), 자기가 수고한 대로 보상을 받게 될 뿐입니다(고전 3:8).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각자 맡겨진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꾼이 한 일은 언젠가는 반드시 주인의 평가를 받게 됩니다. 주의 종들이 행한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때에 상급은 고사하고 책망을 듣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일꾼인 성도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의 일에 대해 보다 신중한 자세와 감사한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모두 하나님의 일을 동역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령한 자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구합니다. 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갑니다. 우리는 육신에 속한 자들처럼 세상의 것들을 따르지 말고, 영에 속한 사람들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곧 시기와 다툼이 아닌 화평과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바울과 아볼로처럼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