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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2025. 11. 30.
성경본문 보기

시편 72편 11절 ~ 19절 [개역개정]

11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2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14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15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6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17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8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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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 절기상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은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에 앞서 그분의 오심을 경건하게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천 년 전에 오셨으나, 하나님이신 그분이 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지를 되새기며,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더욱 굳게 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으로, 성탄절까지 네 번의 주일이 있습니다. 저는 이 기간에 시편에 나오는 메시아 예언을 중심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번 시간에 살펴볼 시편 72편은 ‘솔로몬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내용은 저자 개인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전개됩니다. 먼저 시인은 주의 판단력과 공의를 왕과 그 아들에게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시 72:1). 여기서 ‘왕’은 솔로몬을 가리키는 동시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계 17:14)를 예표합니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후 꿈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그는 지혜와 지식을 구했습니다(대하 1:10; 왕상 3:5). 이 지혜와 지식은 1절에서 언급한 판단력과 공의와 관련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와 지식을 구한 것은 주의 백성을 공정하게 재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왕상 3:9). 2절의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공정한 재판은 통치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늘 강조하신 것이 공정한 재판입니다(신 16:18-19). 공의와 정의는 사랑만큼이나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으로, 이를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면서 제일 먼저 정의를 언급했습니다(미 6:8). ‘정의’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쉬파트(מִשְׁפָּט)는 법적인 용어로 공정한 재판을 의미합니다.

통치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판단력과 공의로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시 72:3).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변호하며, 궁핍한 자의 자녀를 돕고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벌하기 때문입니다(시 72:4). 또한 왕이 공의를 행하면 백성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시 72:5). 즉,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의로운 통치를 하면 백성들도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왕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백성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왕이 우상 숭배에 빠지면 백성들도 범죄 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공의를 행하는 왕은 메마른 땅을 적시는 소낙비와 같아서(시 72:6), 그가 다스리는 동안 의인들이 번성하고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시 72:7). 실제로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공의로 이스라엘을 평화롭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고(시 72:8; 왕상 4:21),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쳤으며, 스바와 시바의 왕들이 예물을 드릴 정도였습니다(시 72:10; 왕상 10:1-22). 비록 말년에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범했지만, 그의 통치 시기에 이스라엘은 가장 번영했고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왕상 3:13; 4:29).

반대로 통치자가 불의를 행하면 백성들은 고달파집니다. 그나마 권세 있는 자들은 피해를 덜 입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결국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왕이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어떤 왕들은 아예 관심조차 없었고, 관심이 있었던 왕들조차 뿌리 깊은 불의를 완전히 타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어느 시대든 고관들이나 백성들의 부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재판장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판결하고, 제사장들은 대가를 바라고 가르쳤으며, 예언자들은 돈을 위해 점을 쳤습니다(미 3:11). 한 마디로 제사장들은 타락했고,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들을 가리켜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이라 불렀습니다(암 5:7).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다’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생명을 주어야 할 정의를 오히려 독초처럼 고통과 멸망을 주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라”고 외쳤습니다(암 5:24). 이는 흐르는 물처럼 정의와 공의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기후와 지형 특성상 와디, 곧 우기에만 흐르는 하천이 많습니다. 반면 요단강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강도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와디처럼 잠시 흘러서는 안 되고 요단강처럼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몇몇 왕에 의한 일시적인 개혁만 있었을 뿐 지속되지 못했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고 알고 있지만, 성경은 그들의 죄가 훨씬 더 복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교만했고, 동성애를 비롯해 온갖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 또 물질적 풍요로 인해 방탕했으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외면했습니다(겔 16:49; 유 1:7; 벧후 2:6–8). 이러한 죄악이 누적되어 마침내 심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죄악은 그들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소돔과 다름이 없었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었습니다(렘 23:14). 특히 유다 백성의 죄악은 더욱 심했습니다(겔 16:51). 소돔이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했다면, 유다는 의인 한 명이 없어 멸망했다고 할 정도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유다는 죄악이 극에 달했습니다(렘 5:1). 비록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동성애의 죄를 범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가증스럽게 여기는 죄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만과 우상숭배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정의를 외면하는 예로는 크게는 불공정한 재판을, 작게는 공정하지 못한 거래를 들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거래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물건을 파는 자가 저울을 속이는 행위 같은 것을 말합니다(신 25:15; 미 6:10-11).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그 사안이나 정도에 따라 징역형이나 벌금에 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슬람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현실에서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가증스러운 죄입니다(신 25:16). 그들은 모두 심판의 대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6:9-10). 그런데 우리는, 특히 기독교인들은 동성애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불법으로 여기시는 행동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동성애나 종교적 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회적 정의를 행하지 않음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사 1:11-17; 암 5:21-24). 이처럼 세상에 불의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곧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5:19). 따라서 어느 지도자가 통치한다 해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공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해야 가능합니다. 본문 11절 이하는 그때 완성될 공의와 평화, 그리고 번영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때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고 많은 왕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지만(왕상 4:21) 모든 왕과 민족이 그에게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닙니다. 이에 해당하는 분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빌 2:9-11).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생명을 억압과 폭력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시 72:12-14 상). 이는 그들의 피, 곧 생명이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72:14 하). 그런데 단지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는 세상에서 고난 받고 핍박받는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를 가리킵니다(계 6: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죽음조차도 귀중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시 116:15).

그리고 15절의 ‘그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은 ‘그’ 혹은 ‘왕’으로 번역했는데, 개역개정만 ‘그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마 14절과 연결하여 구원받은 성도로 해석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왕이신 메시아에게 스바의 금을 왕에게 드리며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날마다 찬송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스바의 금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선물한 예물과 관련 있습니다. 스바는 오늘날 아라비아반도 최남단에 있는 예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볼 때 가장 먼 남쪽, 곧 땅끝을 상징하며 메시아의 권세가 전 세계 모든 지역에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금은 고대에서 왕에게 드리는 가장 귀한 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 왕에게 금 일백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선물했습니다(왕상 10:10). 금만 따지면 어제 금 시세로 약 1조 원에 해당합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최고의 선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스바의 금을 드린다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최고의 감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더불어 그분을 위한 사람들의 기도와 찬송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계 5:13). 그날에는 산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할 것이고, 백성들은 땅의 풀같이 크게 번창할 것입니다(시 72:16 상). 원래 산꼭대기는 땅이 척박해서 곡식이 잘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런 곳까지 풍성하게 된다는 것은 메시아 시대에 누리게 될 풍요와 은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았고, 백성들은 풍족한 삶을 누렸습니다(왕상 4:20, 25). 그러나 말년에 솔로몬의 타락으로 인해 백성들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왕상 12:11).

메시아 시대에는 더 이상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그의 이름이 영원히 있을 것이며, 그의 이름이 해처럼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72:17 상).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복을 받을 것이고, 모든 민족이 다 그분을 복되다고 칭송할 것입니다(시 72:17 하). 다만, 결과적으로 그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뿐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겪으면서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들입니다(계 14:12). 그런 자들만이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롬 8: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시 72:18). 그중에서 가장 기이한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딤전 3:16).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바쳐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에 처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신도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 사건은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요 3:36).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요 3:16).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을 죄인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해야 합니다(시 72:19). 더불어 다가올 메시아 시대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날에 우리는 공의로운 통치 아래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사는 자들은 신앙으로 인해 겪는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디어 마침내 승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