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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내가 왔나이다

2025. 12. 14.
성경본문 보기

시편 40편 1절 ~ 8절 [개역개정]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설교문 보기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인 오늘은 ‘내가 왔나이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큰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입니다. 다윗은 종종 어려움을 겪었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즉시 구원받지 못할 때도 낙심하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이때의 상황은 다윗이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셨다”(시 40:2 상)고 고백할 만큼 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기가 막히다’라는 표현은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갇힌 곳 진흙 구덩이였는데(렘 38:6), 깊어서 혼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고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다윗이 실제로 그런 구덩이에 빠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상황에 놓여 있던 다윗을 구원하시고 그의 걸음을 굳건히 하셨습니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2 하). 비록 다시 환난이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기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에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두셨다"라고 말합니다(시 40:3 상). 이 고백은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셨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벗어났는데,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를 성경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 40년 동안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신 1:33), 그리고 만나가 그 증거입니다(출 16:4). 하루 이틀이라면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4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벌어진 일입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홍해를 육지 같은 건넌 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확실하게 체험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백성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출 14:31). 이는 다윗의 구원을 본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며 여호와를 신뢰하게 될 것이라는 3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시 40:3 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곧이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다윗처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곧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났는데,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러한 신뢰와 찬양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마실 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출 15:22-24). 이러한 원망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감사 대신 원망을, 찬양 대신 불평을, 그리고 신앙 대신 불신을 일삼던 출애굽 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민 14:23).

그런데 신약에는 이들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나마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기적을 경험한 후 곧바로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신약에 등장하는 이 사람들은 감사도, 찬송도 없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나병 환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한 마을에 들어가실 때,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눅 17:11-13, 그림). 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 못한 이유는 당시 나병 환자를 부정한 자로 여겨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지한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7:14).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일은 나병이 나았을 때 행하는 절차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먼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정결하다는 판정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레 14장). 그런데 그들은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고침을 받은 사람처럼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말씀에 순종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나아갔고,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간절함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와 찬송은 없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는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던 중에 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병으로 인해 평생 비참하게 살아야 할 처지에 있었지만, 이제 고침을 받음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깨끗함을 받은 열 명 가운데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눅 17:15-16). 이들을 보며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떤지 돌아보게 됩니다.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받았음에도 그 은혜를 금방 잊어버리고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아닌지, 나병으로 인해 평생 비참하게 살아야 할 처지에서 고침을 받았지만, 감사가 없었던 아홉 명의 나병 환자는 아닌지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고 많은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하나님의 모든 기적은 우리, 곧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생각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미래에 희망을 주려는 것입니다(렘 29:11).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이는 하나님께서 아론의 자손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선포하라고 명하신 축복이며(민 6:23),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축복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복은 메시아의 초림 때 이미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본문 6절과 7절은 그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여기서 제사는 일반적으로 화목제, 서원제, 자원제 등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희생 제사를 뜻하고, 예물은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를 가리킵니다. 또 번제는 율법이 제정되기 이전 널리 행해졌던 제사이고, 속죄제는 죄를 속할 뿐 아니라 부정을 씻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습니다(출 29:14). 따라서 6절에 언급된 제사와 예물, 그리고 번제와 속죄제는 구약에서 행해지던 모든 제사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제사들로는 완전한 죄 사함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0장에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본문 6절의 인용입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이 부분은 본문 7절과 8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히 10:1-7) 여기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되었다”라는 것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예언을 말합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한번 본문 6절과 7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왜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했는가를 설명합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8-9)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 일은 강제가 아니라 자원하여, 기쁨으로 감당하신 일입니다. 다윗은 이를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한다”로 묘사했습니다(시 40:8). 하나님의 뜻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인을 대속하게 하시는 것입니다(갈 1:4). '대속'이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거나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종노릇 하며 영원한 멸망의 형벌 아래 놓여있던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에(롬 6:23),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벧전 3:18). 그렇다고 우리가 자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 대속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고 영접하는 자만이 죄로 말미암은 형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다림의 영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앙의 태도를 말합니다. '기다림' 하면 떠오르는 연극이 있는데,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입니다. 내용은 단순합니다. 해질 무렵,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어느 시골 길가에서 두 사람의 떠돌이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소년이 와서 '고도는 내일 온다'고 말합니다. 다음 날에도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고도를 기다리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계속 고도를 기다리며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이 작품에서 고도가 누구인지, 또 그들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작가도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도는 특정한 인물이라기보다, 인간이 의지하고 싶어 하는 어떤 존재나 소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기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다면 그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고, 그런 삶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도 그 대상을 알지 못한 채 막연히 기다린다면 그 기다림 역시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고 기대하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다림의 대상이 분명합니다. 아니, 분명해야 합니다. 바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2천 년 전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그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골 3:4). 하지만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 24:36). 그래서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윗이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마침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짐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인내하므로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히 9:28; 계 22:12). 오늘도 그분을 기다리며,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