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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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8편 22절 ~ 26절 [개역개정]
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24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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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자, 이를 본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그들이 죽인 생명의 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분의 이름과 그 이름을 믿는 믿음, 곧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행 3:14-16). 그때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막 12:18 ; 눅 20:27).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에 비해 수적으로는 많지 않았으나, 제사장과 공회 의원이 다수 포함된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자(행 4:4)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한 자신들의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종교 지도자로서 그들의 위상은 크게 실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민란이라도 일으킨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려 왔던 모든 권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붙잡아 옥에 가뒀습니다.
이튿날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했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해 대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행 4:6).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운데 세우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 사실 그들이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였습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했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떻게든 이 일을 덮으려고만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9-12) 여기서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말은 본문 22절의 인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시 118:22-23)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버린 돌'이란 건축자들이 집을 짓다가 필요 없다고 내버린 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모퉁이의 머릿돌'은 집 모퉁이에 놓여 벽과 벽을 잇는 주춧돌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축자들에게 버려진 돌처럼 유대 지도자들(마 21:45)에게 멸시와 배척을 받으시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셨으나(사 53:8),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시고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사 믿는 자들의 구원의 기초가 되게 하셨습니다(사 28:16, 행 2:36).
이에 대해 베드로는 자신의 서신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말합니다(벧전 2:4).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예언,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신명기의 약속(신 18:18)을 근거로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자신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그들에게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는 확신을 주었고(요 6:14; 7:40),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요 6:15).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행보가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출교 조치가 내려지자 사람들은 몸을 사렸고(요 9:22; 12:42), 급기야는 예수님을 죽이는 데 동조하기까지 했습니다(행 2:23).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배척을 받으셨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산 돌’이라 한 것은, 비록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돌처럼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는 보배로운 돌로 택하심을 입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배로운 모퉁잇돌'로 묘사했는데(벧전 2:6 상),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을 인용한 것입니다(사 28:16). 앞에서 언급한 대로 유대 건축에서 모퉁잇돌은 건물의 기초가 되는 주춧돌 역할을 했기 때문에, 두 용어는 같은 의미를 지닌 다른 표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돌을 '시험한 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테스트(test)’입니다. 이를 연단(벧전 1:7) 혹은 시련(약 1:2)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확인하고 검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한 일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로 가셨을 때, 남자만 오천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 14:21, 막 6:44).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리를 보내 마을과 촌에서 묵게 하며, 그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눅 9:12). 지금 있는 곳은 빈들이라 잠잘 곳도 마땅치 않고, 사람들을 먹일 만한 음식을 구하기도 어려우니 차라리 주변 마을들로 가서 숙식을 해결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마 14:15).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4:15, 16). 이에 제자들이 당황하자 빌립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떡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실 일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빌립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요 6:6). 이에 빌립은 여건상, 이 많은 무리가 먹을 만큼의 양식을 마련하는 일은 불가능하니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로 대답했습니다(요 6:7). 다른 제자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막 6:37).
이것이 당시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면서도 그분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막 5:42),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것을 직접 보았지만(막 4:39), 정작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자를 살리는 일과 오천 명을 먹이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어렵겠습니까? 사람에게는 둘 다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천 명을 먹이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 그들의 믿음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적을 체험하면 믿음이 생기고 더 견고해질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그 누구보다도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했고(민 14:22)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히 3:19). 그래서 바울은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했고(롬 10:17),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요 20:29).
또 하나의 시험은 유혹(temptation)입니다(마 26:41 ; 고전 7:5). 이는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믿음에서 떠나도록 하기 위해 주는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마귀로부터 직접 시험을 받으셨고(마 4:1-11), 그 후로도 직간접적으로 시험을 겪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라고 증언합니다(히 4:15).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시험에 종종 넘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모두 이기셨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처럼 '시험한 돌', 곧 모든 시험을 통해 검증된 돌이시기에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시며(사 28:16), 보배로운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 2:6 하). 이는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최후의 심판 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신(행 10:42) 그리스도로부터 의롭다는 판정을 받고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롬 10:13),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 3:16). 반면에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된다고 했습니다(벧전 2:8; 사 8:14). 이는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고,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형벌에 처하도록 정하셨습니다(마 25:46).
이제 곧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자"라고 선포합니다(시 118:2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요 12:13)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마 21:9). 이는 본문 25절과 26절을 인용한 것으로, 유대인들은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염원하며 이 구절을 낭송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바랐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장사 지낸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즐거워하고 기뻐하겠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모퉁잇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십니다. 이 돌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일 뿐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고전 1:23-24).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행 4:12).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에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곧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를 고대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히 9:28). 그날에 우리 모두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