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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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잘 15절 ~ 21절[개역개정]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설교문 보기
바울은 회심한지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는 그가 회심한 후 세 번째 였습니다. 그때 동행했던 인물이 바나바와 디도였습니다. 바나바는 레위 지파 출신의 유대인으로 구브로에서 태어나 바울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은 그를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로 불렀습니다(행 4:36). 아마도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데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바울의 회심을 의심했을 때 적극 변호했던 인물입니다. 이후 두 사람은 안디옥에서 사역하며(행 11:26; 13:1)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행 13:2-3). 그러나 2차 선교 여행을 앞두고 마가의 동행 문제로 인해 바울과 결별했습니다(행 15:36-41). 그리고 디도는 헬라인으로(갈 2:3), 바울이 디모데처럼(딤전 1:2) '나의 참 아들'(딛 1:4)이라 부를 만큼 각별히 아꼈던 동역자였습니다(몬 1:24). 그는 그레데에서 목회했으며(딛 1:5), 후에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 달마디아 지방으로 갔습니다(딤후 4:10).
바울은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 계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밝힙니다(갈 2:2). 비록 그 방문이 안디옥 교회의 파송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행 15:2) 그 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측면에서 계시라 말한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이라 할지라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우선했기 때문입니다(갈 1:10).
당시 교회들은 이단 사상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를 비롯해 갈라디아와 그레데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그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며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할례는 모세에 의해 법으로 제정되었으나 실은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행해져 오던 관습이었습니다(요 7:22). 할례는 안식일(출 31:13)과 함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징표였습니다(창 17:11). 그래서 이스라엘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언약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어 백성 중에서 제외되었습니다(창 17:14). 반면에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출 12:48). 심지어 할례는 모든 일을 금하는 안식일에도 시행될 만큼(요 7:23)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만 행해진 게 아닙니다. 의미는 다르지만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 등 셈족 계열의 사회에서 널리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할례를 행하는 민족은 많습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짓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습니다. 할례는 구원의 증표가 아닌 구별의 표시이기 때문에 할례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동시에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믿었고,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 많았습니다(행 21:20). 그들 중 일부가 안디옥에 내려와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행 15:1).
이에 안디옥 교회는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이 맞는지, 또 그들의 가르침이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 입장인지 확인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다른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이때 디도가 함께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을 그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갈 2:20상). 자신들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일이라고 한 것은 이방인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자가 된 어떤 이들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행 15:5).
이에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예루살렘 총회를 소집했습니다(행 15:6). 바울은 총회가 소집되기 전 개인적으로 유력한 자들, 곧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갈 2:9)에게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복음을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사역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갈 2:2하),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모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이 아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행 15:11). 이에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갈 2:9), 충분한 논의 끝에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비롯한 율법 준수를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행 15:19). 이는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으며, 그에 따라 헬라인인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습니다(갈 2:3). 그럼에도 여전히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성도들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어들이려고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갈 2:4).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요구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가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갈 2:5). 물론 갈라디아 교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복음의 진리 안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거짓 형제들의 요구에 따라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면, 구원이 은혜가 아닌 율법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복음의 진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입니다.
'복음의 진리'란 복음이 곧 진리라는 의미입니다(엡 1:13; 골 1:5). 이 진리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가 있지만, 율법에 얽매인 자에게는 그 자유가 없습니다. 율법은 모든 조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고 항상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범한 것이 됩니다(약 2:10). 그러나 죄인은 이를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감당할 수 없는 멍에로 묘사합니다(행 15:10). 그럼에도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은 결국 그 멍에 아래에서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진리를 알면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요 8:32). 그 진리는 바로 구원의 복음, 곧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엡 1:13). 바울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있을 때 베드로가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회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바나바를 비롯한 유대인 신자들이 있었고(행 13:1), 그들은 이방인 신자들과 자유롭게 교제하며 함께 식사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안디옥에 머무는 동안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도착하자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위선적인 행동을 했습니다(갈 2:11-13).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라고 믿고 가르치면서도, 실제로는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피함으로써 위선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들이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은 그들이 할례자들, 곧 유대인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던 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부정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일로 인해 할례자들의 비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고넬료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변호하기까지 했습니다(행 11:1-18). 그럼에도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 거리를 두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행동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이 아니었으며(갈 2:14상),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큰 실망감을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 2:14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처럼 행동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행동할 것을 강요하느냐는 질책입니다. 이는 결국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유대인들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있었던 이 사건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갈 2:16). 율법은 사람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할 뿐입니다(롬 3: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값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롬 8:3). 이로써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 곧 의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롬 8:4). 다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롬 3:26)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요 3:16). 이 밖에 우리가 구원 얻을 길은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며, 결코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갈 2:21). 죄인이 율법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죄인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갈 2:19; 롬 7:4).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갈 2:20).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