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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2023.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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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1장 1절 ~ 9절[개역개정]
1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
2 셋째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내려가매
3 이스라엘의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4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5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6 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7 여호사밧이 이르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8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9 이스라엘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설교문 보기

아합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년째 되는 해 남유다는 아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위에 올랐습니다(왕상 22:41). 그는 아버지처럼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는 왕이었지만 허물도 적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22장은 여호사밧의 허물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합 왕 때 세 차례에 걸쳐 아람과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1차와 2차는 아람의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했으며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3차 전쟁은 이스라엘과 유다 이·유 연합군의 침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차 전쟁이 있은 후 3년째 되는 해에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합니다.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늘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왕상 15:6, 7, 16). 그런데 갑자기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뒤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합은 여호사밧과 그 일행을 위해 잔치를 벌인 후(대하 18:2) 길르앗 라못을 치려고 하는데 동참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요단 동쪽에 있는 성읍으로 무역의 중심지이면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본래는 아모리 족속에 속한 성읍이었는데 모세 때 정복한 이래로 줄곧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람 왕 벤하닷 1세에게 이 성을 빼앗겼습니다(왕상 15:20). 2차 전쟁에서 패한 아람 왕 벤하닷 2세는 길르앗 라못을 비롯해 부친인 벤하닷 1세가 빼앗은 모든 성읍들을 돌려주겠다고 아합 왕에게 약조를 했습니다(왕상 20:34). 하지만 3년이 되도록 이 약조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길르앗 라못을 치기로 하고 여호사밧에게 원조를 요청한 것입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길르앗 라못을 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를 여쭤 보자는 것이었습니다(왕상 22:5). 여호사밧은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정직히 행하며 이방신에게 묻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구하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대하 17:4). 그래서 길르앗 라못을 치는 것에 대해 서도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먼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중대한 일을 앞두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움직였습니다(삼하 2:1 ; 5:19 ; 대하 14:14).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으로 하여금 어디를 가든지 이기도록 하셨고, 무엇을 하든지 형통케 하셨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물었으며(대상 10:13, 14)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다가(삼상 15:24)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삼상 15:23 ; 삼하 6:21).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일을 진행하다가 큰 낭패를 보기도 했습니다(수 9:14).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기도하고 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옳고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잠 14:12). 길르앗 라못을 도로 찾아야 한다는 아합의 주장은 일면 타당했습니다. 모세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의 소유였고(왕상 22:3), 전쟁에서 패한 아람 왕이 돌려주겠다고 약조까지 했지만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길르앗 라못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아합의 주장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정당한 권리이자 올바른 처사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긴 경험도 있고 유다까지 합류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길르앗 라못 원정은 아합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아합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소견에 옳아 보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를 여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고 낭패를 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길르앗 라못을 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를 여쭤 보자는 여호사밧의 제안에 아합은 4백 명 정도 되는 선지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선지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엘리야와의 갈멜산 대결에서 살아남은 아세라 선지자들로 보기도 하고 단과 벧엘에 세웠던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로 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거짓 선지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롬 16:18 ; 벧후 2:3).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않습니다. 거짓 예언을 일삼을 뿐 아니라(왕상 13:18 ; 렘 28:2) 권력에 편승하거나 심지어 우상과 타협하기도 합니다. 아합이 불러 모은 4백 명의 선지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길르앗 라못을 치러 올라가는 것이 좋은 지, 아니면 그만두는 것이 좋은지를 묻는 아합에게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니 올라가라고 했습니다(왕상 22:6, 12). 특히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만든 뿔을 가지고 와서는 '여호와께서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모두 거짓입니다.

여호사밧은 그들의 예언이 미심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적 감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호사밧은 그들의 예언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외에 우리가 물어볼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는 자가 있긴 하지만 그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길한 일 곧 좋은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 즉 나쁜 일만 예언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4백 명의 선지자들은 언제나 왕에게 좋은 일만 예언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보전하고 안위를 보장받고 각종 혜택을 누렸을 것입니다. 반면에 미가야 선지자는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했습니다(왕상 22:8, 14). 악한 왕이었던 아합이 그런 미가야를 좋아할 리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가야는 이스라엘의 패배를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이 왜 승리를 예언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거짓 영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짓 영에 속아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고 있는 조차 모릅니다. 몰랐다고 해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이 거짓 영에 미혹되는 것은 진리를 거부하고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살후 2:11, 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는 사도 요한의 경고처럼 그 말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해 봐야 합니다.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는지 성경을 상고하고 그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않습니다.

3. 믿지 않는 자들과 연합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북이스라엘 방문은 아합의 초대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늘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여호사밧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가 결혼함으로 인척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대하 18:1). 이는 솔로몬의 경우처럼 정략적인 결혼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왕위에 오른 후 마음을 다하여 다윗의 처음 길로 행했습니다. 우상들을 제거했고 오직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따랐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든든히 세워 주셨고 여호사밧은 큰 부와 명예를 갖게 됐습니다(대하 17:5). 그런 여호사밧이 아합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비록 아합의 가문이 같은 민족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으므로 이방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이 패할 것이라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음에도 아합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갔습니다. 꺼림칙했지만 동맹을 맺은 이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대하 18:31). 여호사밧이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 왕을 찾아와서 책망합니다.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는 여호사밧의 아버지 아사를 책망했던 선지자였습니다(대하 16:7).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대하 19:2). 그리고는 여호사밧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호사밧이 죽은 후 남유다는 그의 아들 여호람이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저질렀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그가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왕하 8:18). 사실 아합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이 된 것도 우상을 섬기는 이방여인 이세벨과 결혼한 영향이 컸습니다(왕상 21:2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믿지 않는 자들 특히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연합하지 말아야 합니다(고후 6:14). 세상 사람들 특히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동업이나 결혼 등 친밀한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와 세상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될 수 없는 것처럼 성도와 세상 사람들은 결코 화합할 수 없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과 아예 상종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고전 5:10).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사밧처럼 큰 낭패를 볼 수 있고 심지어 패가망신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사밧의 아버지 아사는 하나니로부터 책망을 들을 때 오히려 화를 내며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대하 16:10). 이는 교만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보다는 도리어 화를 내고 심지어 해를 가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호사밧은 예후의 책망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일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던 것처럼 여호사밧도 예후의 권고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신앙 개혁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회복했고 공정한 재판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바로 서도록 사법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대하 19:4-9). 이렇듯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아합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교만한 자들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 선지자들에게 쉽게 미혹되지 않고 악한 자를 돕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일평생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섬기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