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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023. 3. 16.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22장 34절 ~ 46절[개역개정]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 세금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신 후에 이어서 사두개인들과 부활에 대해 변론하셨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 가운데 한 율법교사(서기관, 막 12:28)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셨습니다(요 7:15). 그럼에도 가르침에 있어서는 어느 랍비보다 탁월하셨습니다(마 7:28 ; 막 11:18 ; 눅 4:22 ; 요 7:46). 율법교사는 전문 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예수님이 과연 자신의 질문에 올바른 답변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볼 요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마 22:7-39)고 하셨습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 곧 성경 전체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는 것으로 이 계명들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는 의미입니다(막 12:31).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6장 4절부터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2:29, 30). 그리고 둘째로 언급하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계명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출 20:1-23:33 등). 그런데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이 계명을 613개로 세분화했고 여기에 장로들의 전통(마 15:2)을 추가했습니다. 랍비들 사이에서는 이 율법들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크고 중요한지에 대해서 계속 논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계명은 십계명으로 요약이 되고, 십계명은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계명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롬 13:9).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은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사람에 대한 계명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둘 다 크고 중요한 계명으로 규정하셨습니다(마 22:40 ; 막 12:31). 사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처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요일 4:20). 그러면 이웃이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본문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계명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말이 옳다고 하시며 "이를 행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교사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동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은 이웃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한 비유를 들어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바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분명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은 채로 버려두고 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길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어떤 레위인도 그곳에 와서 그 사람을 보고는 역시 길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지도자들로 어느 누구보다 율법의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강도를 만난 사람은 자신들이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동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을 외면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나름 변명거리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같은 민족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멸시를 당해야만 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지만 그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피해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도 만난 자를 불쌍하게 여겨 치료해 주었고 자기의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보살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사마리아인은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 기대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시면서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동족이든 아니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 우리의 이웃이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웃이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고 있고 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는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면했습니다(요일 3:18). 하나님을 사랑하되 말뿐이 아닌 온 맘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입니다. 행실을 조심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삶의 방향과 기준으로 삼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율법교사의 질문에 답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의 대답은 '다윗의 자손'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대답이 나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오며(사 11:1 ; 요 7:42), 그분이 곧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사 9:2-7).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한 사람들은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마 15:22; 20:31; 21:15).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시편 110편 1절로 다윗의 시입니다. 이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가 되신다는 모순적인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을 '주'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주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אֲדֹנָי)'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퀴리오스(κύριος)'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권위에 대한 존경의 호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창 23:6 ; 24:18 ; 42:10 ; 43:20).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이유로 ‘여호와(야훼)’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이 칭호가 같은 의미의 '퀴리오스'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퀴리오스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마 22:44).

그런데 시편 110편 1절에는 두 분의 '퀴리오스'가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유일한 주로 믿고 있었는데(막 12:29, 32), 시편 110편 1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두 분의 주님이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우리는 이 두 분의 주님이 성부 하나님이신 여호와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를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선지자 가운데 하나로만 생각했습니다(마 16:14). 더욱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요 7:52). 그러니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하셨을 때(마 9:2 ; 눅 7:48)나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를 신성모독으로 여겼습니다(마 9:3 ; 요 10:33). 지금도 유대인들은 대부분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믿든 안 믿든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육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롬 1:4)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십니다(요 1:1 ; 빌 2:6).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딤전 1: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요 3:1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죄인이 구원 얻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행 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