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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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장 1절 ~ 17절[개역개정]
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6 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9 이에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10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11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그가 엘리야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2 엘리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13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14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15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
16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17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설교문 보기
아합 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하시야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붙잡으셨다'는 뜻으로 여호와 신앙을 배격하고 바알을 숭배했던 아합과 이세벨이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성호인 여호와와 관련해서 지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하시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동생 역시 '여호와께서 일으키신다'는 뜻의 여호람(요람, 왕하 8:16)이었고(왕하 3:1) 딸인 아달랴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왕하 8:26). 왜 아합과 이세벨이 아들들과 딸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했습니다(왕상 22:52 ; 왕하 3:2). 그러면 아하시야가 어떤 인물인가 살펴봄으로써 신앙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합니다.
1. 부모를 잘 못 만나 불행한 사람
아버지 아합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하시야는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왕상 22:51 ; 왕상 1:17). 아합의 22년(왕상 16:29)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기간이지만 시므리(7일, 왕상 16:15)나 살룸(1개월, 왕하 15:13), 스가랴(6개월, 왕하 15:8) 등 통치 기간이 6개월 미만의 왕들에 비하면 그나마 긴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통치 기간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나라를 잘 다스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가 하는 것이 평가의 기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눈에 올바르게 혹은 옳은 일을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옳은 것처럼 보이는 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것일 수 있습니다(잠 14:22 ; 16:25).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인지를 가르쳐 주는 인생의 교과서와 같기 때문입니다(시 119:105).
이스라엘의 역대 왕 중에서 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물이 다윗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삶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죄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반면에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다윗과는 정반대로 악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끈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습니다. 그중에서 아합은 여로보암의 죄가 오히려 가벼워 보일 정도로 우상숭배에 매진한 왕이었습니다(왕상 16:31).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아버지 오므리의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 바알을 섬기는 수장 엣바알의 딸 이세벨(왕상 16:31)과 결혼한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왕상 21:25).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역시 아버지 못지않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 하게 한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행했던 것과 똑같이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분노하시게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부모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하시야는 부모를 잘못 만나 불행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잘 섬기는 부모의 자녀들이라고 해서 모두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은 모든 일에 정직하고 공평했지만(삼상 12:3) 그의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와 달리 돈을 탐하여 뇌물을 받고 재판을 불공정하게 처리했습니다(삼상 8:3). 히스기야는 다윗을 본받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지만 그의 아들 므낫세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처럼 남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왕하 21:11). 반면에 히스기야나 요시야는 우상 숭배를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왕하 22:2). 이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는 부모의 자녀라고 해서 모두 신앙의 길을 걷는 것도 아니고 우상을 숭배하는 부모의 자녀라고 해서 불신앙의 길을 걷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신앙의 가정에서 신앙의 사람이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왕조도 다르고 모두 불신앙의 사람들이었지만 남유다의 왕들은 아달랴를 제외하고 모두 다윗 가문의 자손들로 그중에서 아사나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등 신앙의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신앙의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나쁜 부모는 자신들의 영혼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영혼까지 더럽히는 데 일조하거나 방치하는 자들입니다. 부모의 불신앙과 잘못된 행실 때문에 자녀들의 영혼이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습니다. 따라서 부모 된 자들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가 죄에 얽매이지 않고 신앙에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히 12:1). 쉽지는 않지만 우리 자녀들이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그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자손 대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신앙의 가정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신뢰한 사람
어느 날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방 난간에서 떨어져 죽음을 걱정할 정도로 크게 다쳤습니다. 이때 아하시야는 사신들을 블레셋의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당시 블레셋은 가사와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등 다섯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합국가였습니다(수 13:3). 이들이 섬기던 신들은 도시마다 달랐습니다. 가사와 아스돗은 다곤을 숭배했고(삿 16:23 ; 삼상 5:3), 아스글론 사람들은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에그론은 바알세붑을 숭배했는데, 신약의 바알세불과 같은 신입니다(마 10:25). 에그론 사람들은 이 바알세붑을 치료의 신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아하시야가 사신들을 에그론에 보낸 이유는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왕의 사신들을 만나 여호와의 사자 곧 천사에게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왕상 1:3, 6).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첫 번째로 하신 명령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출 20:3). 그렇다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길 뿐입니다(출 20:5). 그래서 하늘에나 땅에나 물속에 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많습니다(고전 8:5). 이스라엘 백성이 살았던 이집트나 그들이 살게 될 가나안은 우상의 소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들의 신들을 섬길까 염려하셨습니다(신 29:18). 그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비롯해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하시는 한편 우상이 얼마나 헛된 존재인가를 설파하셨습니다.
우상은 나무나 돌에 금이나 은을 입히거나 부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생기가 없습니다(렘 10:14 ; 합 2:19). 그래서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합니다(시 115:7). 우상은 마치 허수아비와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 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반드시 운반해야 합니다(렘 10:5).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우상이 어떻게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거나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를 구해 낼 수도 없는 헛된 우상을 따르지 말고 의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삼상 12:21). 우리가 의지하고 신뢰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삼하 7:22). 그분 만이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신 30:15, 16 ; 마 10:28).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하거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왕이 보낸 사신들이 돌아와서 엘리야의 말을 전하자 아하시야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생김새를 전해 듣고는 그가 엘리야임을 알았습니다. 아하시야가 그를 직접 봤는지 아니면 그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생김새만 듣고 그가 엘리야라고 확신한 것은 평소 그를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아하시야는 엘리야가 행한 일들 특히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사건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엘리야가 자신에게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죽음을 선포했습니다. 아하시야의 아버지 아합은 엘리야로부터 재앙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겸손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왕상 21:27). 그러나 아하시야는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붙잡기 위해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 50명을 보냈습니다. 이는 아하시야가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를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오십부장은 엘리야가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그는 비록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산 아래에서 엘리야에게 명령하듯 내려오라고 소리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너와 너의 부하 오십 명을 태워 버릴 것이다" 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50명을 태워버렸습니다. 그러자 아하시야는 다시 오십부장과 50명을 보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것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가 참 하나님인지를 가리는 척도가 될 정도로 큰 이적이었습니다(왕상 18:24). 그럼에도 아하시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집트의 바로처럼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들 역시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왕은 또다시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 50명을 보냈습니다. 이제 아하시야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두 번씩이나 자신이 보낸 군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의해 죽임을 당했음에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더 이상의 자비는 없습니다. 아하시야는 결국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왕하 1:16, 17). 이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말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하시야가 세 번째로 보낸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들은 앞의 두 오십인 부대와는 달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진정 하나님의 사람임을 깨달은 오십부장이 겸손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과 그 부하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 주기를 간청했기 때문입니다(왕하 1:13, 14).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잠 3:34 ; 약 4:6 ; 벧전 5:5)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또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거나 복을 주지도 못하고 구원할 수도 없는 헛된 우상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도 말고(렘 10:2)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신학자 벵겔(Hengel)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우상도 사람도 아닌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신앙으로 잘 이끌어 줘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