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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2023. 4. 20.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25장 31절 ~ 46절 [개역개정]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마 16:16).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자신이 받을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는지, 제 삼일에 살아나신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눅 18:34).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마치 잘못한 사람을 나무라듯 말했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며 서열에 관한 논쟁을 벌일 만큼 정치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시며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27). 그리고 그때의 광경 즉 최후 심판 때의 모습을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이스라엘 지역의 목자들은 낮에 양과 염소가 함께 풀을 뜯게 하다가 밤이 되면 둘을 구분하여 따로 두었습니다. 염소는 양과 달리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에 모든 민족을 양의 무리와 염소의 무리로 구분하여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세우실 것입니다. 양을 오른편에, 염소를 왼편에 두는 것은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산헤드린 공회에서 유죄로 확정된 사람은 왼편에 세우고, 무죄가 선고된 사람은 오른편에 세우는 관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쪽에 있는 무리를 가리켜 '복 받은 자들'이라 하셨고(마 25:34) 왼쪽에 있는 무리에게는 '저주를 받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5:41). 이렇게 사람들이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입니다(마 16:27). 바울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했습니다(롬 2:6 ; 고후 5:10).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민족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나 명예, 재산의 많고 적음 혹은 높고 낮음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민족이든 어느 계층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있습니다(롬 2:7, 8). 그러면, 양으로 구분된 무리와 염소로 구분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 36). 이에 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 25:37-39). 양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자를 돌보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는 등 선행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적인 면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마 19:19)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5:40). 그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창세로부터 의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 곧 천국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마 25:34).

반면에 염소로 구분된 무리는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도 않았고,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그네를 영접하지도, 병든 자를 돌보지도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인색했습니다. 또 그들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웃을 돕는 것이 예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분명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만일 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가 주님인 줄 알았더라면 기꺼이 도왔을 것'이라고 말입니다(마 25:44).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0:42). 비록 외적으로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요 13:20). 그럼에도 '주님인 줄 알았더라면 기꺼이 도왔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혹 그들이 이웃을 도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들의 가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 자비란 단지 자신의 명성을 쌓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마 25:41) 영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25: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행 16:31).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자(막 1:24 ; 눅 4:34)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롬 10:9)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행 10:43 ; 엡 1:7)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행 13:39 ; 롬 3:28, 30 ; 4:5 ; 5:1),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됩니다(요 3:16 ; 딤전 1:16). 이 외에 죄인이 구원받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요 14:6 ; 행 4:12). 사람이 제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가 쓴 편지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사실들을 강조했습니다(롬 3:28 ; 5:1 ; 갈 2:16). 그런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 것'(약 2:20)이요 '죽은 것'(약 2:17)이라고 하면서 '그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약 2:14)고 묻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러한 발언 때문에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행함은 바울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 10). 주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퀴리오스'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권위에 대한 존경의 호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창 23:6 ; 24:18 ; 42:10 ; 43:20).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이유로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이 칭호가 같은 의미의 '퀴리오스'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퀴리오스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마 22:44). 그런데 이방인들 역시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왕에게도 이 호칭이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자신이 세상의 주와 하나님이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부르도록 강요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퀴리오스, 주로 시인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요 세상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마 10:22). 그런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곧 그의 믿음이 참 믿음임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인 즉 고백이 없는 믿음은 거짓이라 할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바로 그 '죽은 믿음'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 7:21). 단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은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마 7:23).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떼려야 뗄 수 없고 나누려 해도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 없어도 나머지는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행함을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약 2:18). 행함은 믿음의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단지 생활의 일부일 뿐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또 마땅히 해야 할 일기도 합니다. 그것이 양의 무리로 구분된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고(마 23:23) 미가 선지자가 말한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미 6:8).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롬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