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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하나님의 사람에게

2023. 4. 24.
성경본문 보기

열왕기하 4장 1절 ~ 7절 [개역개정]

1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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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4장에는 네다섯 가지 기적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적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건들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명사구(名詞句)가 있습니다. 바로 '이쉬 엘로힘(אִישׁ אֱלֹהִי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뜻으로 구약에서 여호와의 선지자(삼상 3:20)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칭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선견자(삼상 9:9 ; 대하 16:7) 곧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유다 왕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연합군이 위기를 맞자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았습니다(왕하 3:11).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분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았다거나 하나님의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과 동의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가운데 한 여인도 어려움을 당하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부르짖었습니다(왕하 4:1). 남편이 죽자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와서 두 아들을 종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아들들은 어렸을 것이고, 과부로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어려움을 해결할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고 또 믿었기 때문입니다.

수넴 여인도 아들이 죽자 하나님의 사람을 찾았습니다(왕하 4:22). 그녀는 과부와 달리 부자였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재물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넴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엘리사로 하여금 그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왕하 4:35). 선지자의 제자들도 들호박으로 끓인 국이 독성으로 인해 먹지 못하게 되자 하나님의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문제를 해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왕하 4:41).

이처럼 우리가 어려운 상황이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을 불평하거나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시 146:3, 5).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도움을 호소하는 과부에게 집에 무엇이 있는지 묻고는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에 "이웃들에게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지시였지만 그것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이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때론 상직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 11:1). '실상'이란 '실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체를 아직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는 엘리사의 말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빌려온 그릇들에 모두 기름이 찼고 그것을 팔아 빚을 갚았을 뿐만 아니라 남은 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왕하 4:7).

수넴 여인 역시 엘리사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수넴에 7년 동안 기근이 있을 것이니 가족과 함께 다른 곳으로 가서 살라는 엘리사의 말에 그대로 따랐습니다(왕하 8:1). 사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재산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1, 2년이 아니고 7년이나 말이죠. 그럼에도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여 가족과 함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가서 7년을 살았습니다. 7년이 지나 수넴 여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왔는데, 자기의 집과 토지는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의 소유는 물론이고 7년 동안 그의 밭에서 난 소출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왕하 8:6).

또 어떤 사람이 보리로 만든 빵 스무 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리자 엘리사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사환이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그것을 어떻게 내놓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신앙적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자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사람들을 위해 먹을 것을 사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눅 9:13).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겠는가'하는 비관적인 생각에서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현실적이기는 하나 역시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천 혹은 수 만 명을 먹일 수 없습니다. 스무 개의 빵과 채소 한 자루로 백여 명이 먹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정말 조금씩 나눠 먹는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가능은 없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마 19:26). 하나님께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 두 바구니를 거두게 하셨으며 스무 개의 빵으로 백여 명이 먹고도 남게 하셨습니다(왕하 4:44). 한 그릇의 기름으로 많은 그릇을 차게 하셨으며 죽은 사람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못 하실 일이 전혀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고(시 119:50 ; 고후 1:3, 4) 환란 중에서도 피할 길을 얻으며(시 32:7 ; 59:16 ; 렘 16:19)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롬 8:28).

3.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처음 봤을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엘리사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왕하 4:9). 그래서 엘리사에게 권하여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 이후로 엘리사는 수넴에 갈 때마다 그의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상의한 후 엘리사를 위해 옥상에 작은 방 하나를 만들어 그가 올 때마다 쉬어 가도록 했습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며 사양했습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대접한 이유는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뭔가 해주고 싶었던 엘리사는 사환인 게하시로부터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녀를 불러 '한 해가 지나 이때쯤에 아들을 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요 복으로 여겨졌습니다(신 28:4, 11 ; 시 127:3, 5). 반면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로 간주되었습니다(시 113:9 ; 삼상 1:6 ; 눅 1:25). 특히 가부장적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아들이 없다는 것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룻 4:14) 아들의 존재여부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늙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은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엘리사의 말에 "당신의 여종을 속이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말대로 그녀는 임신하였고 다음 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한 수넴 여인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아들이 없음으로 인해 멸시나 수치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대가 끊길 염려도 없었습니다. 이는 개인의 복일뿐만 아니라 그 집안의 복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롬 12:13). 또 히브리서 기자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했는데(히 13:2) 이는 손님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손님 대접’으로 번역된 헬라어 필롴세니아(φιλοξενία)는 친절한 혹은 친구를 나타내는 필로스(φίλος)와 나그네 혹은 손님을 의미하는 크세노스(ξένος)의 합성어입니다. 즉 대접이란 '손님이나 나그네를 친한 친구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입니다.

사실 손님이나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신앙을 떠나 사람의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시 박해를 피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힘에 부칠 수도 있었고, 그로 인해 어려움이나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불평하거나(벧전 4:9)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마 10:42 ; 25:35)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딤전 3:2; 5:10).

그런데 손님을 대접함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입니다(마 7:12).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고 인체에 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양이 적어 예로부터 귀하고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황금같이 귀중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귀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7-40)인 것처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마 7:12).

어느 이방인이 힐렐이라는 랍비에게 찾아와 '자신이 외다리로 서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주면 유대교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힐렐은 '남이 당신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말라 그것이 율법의 전부요 기타는 다 주석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외경인 토비트서에도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4:12).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이나 남이 당신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 혹은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사실 누군가로부터 대접을 받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상대방도 나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접을 할 때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대접을 받을 목적으로 대접을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일 뿐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딤전 3:2 ; 5:10). 그러다가 아브라함인 롯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할 수도 있습니다(히 1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흔히 광야에 비유합니다. 광야는 사막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닙니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마실 물도 구하기가 힘든 곳이 광야입니다. 이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굶주리거나 목말라 죽은 사람도 없고 옷이 해어지거나 발이 부르튼 사람도 없습니다(신 8:4).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면 능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고난 중에서 위로해 주시고, 환란 중에서도 피할 길을 얻게 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롬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