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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2023.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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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장 6절 ~ 13절 [개역개정]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에브라임에서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요 11:18) 베다니라는 마을에 이르셨는데 그때가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요 12:1).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마을이기도 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장소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었습니다(마 26:6). 정확히 말하면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로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레 13:46). 만일 시몬이 당시 나병환자였다면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시몬은 과거 나병환자였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몬이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의 남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마르다가 그 잔치에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요 12:2)는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도 다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르다뿐만 아니라 그의 오빠 나사로와 동생 마리아도 참석을 했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매우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요 11:2). 마태와 마가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요한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요 12:3) 곧 나사로의 누이동생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도 한 여자가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주님의 발에 붓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눅 7:36-50), 비슷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향유는 ‘나드’(막 14:3)였습니다. 이 향유는 히말라야나 인도의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나르도스타키 자타만시(Nardostachys jatamansi)'라는 식물의 뿌리와 줄기에서 채취한 것으로(라이프성경사전) 한 근(300g)에 삼백 데나리온 이상(막 14:5) 즉 일반 노동자의 약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할 만큼 매우 비싼 향유였습니다. 구약성경에 '나도 기름'(아 1:12) 혹은 '나도풀'(아 4:13)로 번역된 식물이 바로 이 식물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은 낭비이며 가룟 유다의 말처럼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요 12:5).

제자들의 이러한 생각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값비싼 향유를 자신에게 붓는 마리아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마리아의 행위를 변호하시며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0-12).

유대인들은 향유를 시체에 바르거나 부었는데 이는 시체가 썩는 냄새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막 16:1). 마리아 어떤 이유 혹은 목적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평상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던 마리아(눅 10:39)가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장례를 위해 미리 향유를 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여인처럼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마리아는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습니다(막 14:8).

그리고 마리아가 행한 이 일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낭비가 결코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말처럼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마 26:11 ; 신 15:11) 그들을 도와줄 시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때가 아니면 장례를 위해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을 기회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후 여인들이 그의 몸에 바르기 위해 향유를 준비했지만(막 16:1)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으로 매우 값지고 아름답고 좋은 일이었으며(막 14:6), 그 일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마 26:13).

또한 마리아에게 있어 나드 향유 한 옥합은 어쩌면 전재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에 대해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4:8). '힘을 다하여'란 '할 수 있는' 혹은 '힘이 미치는 대로'란 뜻으로 '자신이 가진 전부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부자에게 있어 나드 한 근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는 한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두 렙돈에 비견됩니다(막 12:42).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로 당시 로마에서 일회 목욕비였다고 합니다. 삼백 데나리온에 비하면 정말 적은 금액지만 과부에게는 그것이 전재산이었습니다(막 12:44). 마리아나 과부는 금액을 떠나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가진 전부를 드릴 때 그것이 곧 진정한 헌신이 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자신의 모든 소유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아낌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꼭 헌금일 필요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거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 사용하든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됩니다(요 8:29 ; 롬 12:2 ; 요일 2:17). 사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면 자신의 힘이 미치는 대로 언제든지 그리고 기쁘게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때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느냐'며 화를 냈던 이유는 그가 정말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 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 있는 돈을 종종 훔쳐 갔기 때문입니다(요 12:6). 만일 마리아가 향유를 팔아 그 돈을 맡겼다면 유다는 적지 않은 돈을 착복했을 것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재정을 맡을 정도로 셈에 밝았으며 신임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재정을 맡아보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결국 돈 때문에 예수님마저 은 삼십에 팔아넘기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마 26:15). 만일 유다가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온전히 예수님을 따랐다면 다른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순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놓쳐버렸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마 26: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위선의 대명사'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알고(요 7:49) 또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눅 18:11, 12). 그래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지만(눅 16:15)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위선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척했지만 마음속은 온갖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재물에 대한 욕심인데, 그들은 돈을 좋아한 사람들이었습니다(눅 16:14).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있겠습니까마는 바리새인들은 그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바리새인들 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그런 자들이 있었습니다(딤전 6:10).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로 번역된 헬라어 '마모나스(μαμωνᾶς)'는 돈이나 물질적 소유를 가리키는 아람어로 보통 '맘몬(Mammon)'이라 부릅니다. 맘몬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재물의 신 풀루토스(πλοῦτος, 재물)처럼 갈대아 지역에서 섬기던 재물의 신으로 보기도 하고, 그냥 재물을 하나의 우상으로 인격화시킨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재물이 하나님보다 우선이 되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관심을 갖고 더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신뢰하고 의지하면 할수록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결국은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한편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자신의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없고,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는 없습니다(마 6:27). 오히려 염려는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막는 가시떨기처럼(마 13:22) 신앙의 성장을 막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재물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그리고 이 세상보다는 영원한 세계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떨쳐 버리고 인생의 향락을 멀리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고전 10:31). 자신의 탐욕을 위해 스승까지 팔아버린 가룟 유다가 아니라 마리아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