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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씻어 깨끗하게 하라

2023.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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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5장 1절 ~ 14절 [개역개정]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 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설교문 보기

북이스라엘은 종종 아람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아합 왕 때는 세 차례에 걸쳐 전쟁이 있었는데, 1·2차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승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3차 전쟁에서는 패했고 이 전쟁에서 아합이 전사를 합니다(왕상 22:35). 이는 아합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왕상 20:42 ; 22:38).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나 랍비들은 이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운 이가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일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왕하 5:1)는 말씀의 배경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람 왕은 그런 나아만을 아끼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또한 강한 용사였지만 나병환자이기도 했습니다. 나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צָרַע, 차라)는 나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악성 피부질환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나병은 지금이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나병이 천병(天病)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질환이었습니다. 이런 나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던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와서 고침을 받게 되는데, 그 과정은 우리에게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참된 신앙은 순종이 따릅니다.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관으로서 왕에게 총애를 받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재물도 많았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나병이란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의술이든 주술이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병을 치료하려 했겠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왕하 5:3). 그는 아람 왕의 서신 곧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왕하 5:6)라는 내용의 서신과 함께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 그리고 의복 열 벌을 가지고 사마리아로 가서 이스라엘 왕을 방문했습니다.

아람 왕의 서신을 받아본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으면서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며 분노했습니다. 아람 왕이 자신에게 나아만의 병을 고쳐 달라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나아만을 자신에게 오도록 했고 나아만은 수행원들과 함께 엘리사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선지자가 직접 나와서 자신을 정중히 맞이하고,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환부 위에 그의 손을 흔들어 나병을 고쳐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선지자는 나오지 않고 사환을 통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될 것이라'는 말만 전해 들었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도 한 나라의 군대장관이 왔는데 직접 나오기는커녕 사환을 보내 한다는 말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된다'라고 하니 어이도 없고 화도 났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마리아에서 요단 강까지는 평탄한 길이 없어 멀리 돌아서 가야 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그는 나병이 물로 씻어 나을 것 같으면 굳이 요단 강처럼 더러운 물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나라에 있는 바르발이나 아바나 같이 맑고 깨끗한 강에서 몸을 씻으면 되지 않겠냐며 일행을 데리고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종들이 나아만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왕하 5:13).

요단 강에 몸을 씻는 일은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나아만으로 하여금 선지자의 말을 의심케 했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큰 일을 행하라고 했다면 따랐을지 모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을 듣고는 마음을 돌려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음으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칠은 완전수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것은 완전한 순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요단 강물 자체에 치유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사실 나아만이 처음부터 선지자의 말을 신뢰했더라면 불평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종들의 권면에 마지못해 선지자의 지시에 따른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고 나병에서 치유받을 수 있었습니다(왕하 5:14).

신앙은 우리에게 이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순종만을 원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나아만처럼 마지못해 순종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순종이라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시고 자꾸 쓰러지자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억지로 지워 가게 했습니다. 아마도 시몬은 처음에 이를 반대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흉악한 죄인이나 반역죄를 범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저주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갈 3:13). 더욱이 유월절 축제를 앞두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꺼림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식민지 사람들은 자기에게 부과된 일이 천한 일이건 싫은 일이건 간에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때문에 구레네 시몬도 좋은 싫든 간에 십자가를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마지못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것은 시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막 15:21 ; 롬 16: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신앙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비록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순종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만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된 것처럼(요 20:29) 마지못해 순종하는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자가 더 복 있는 사람입니다.

2. 참된 신앙은 타협하지 않습니다.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나아만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 다른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왕하 5:15)고 고백하면서 예물을 받아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이 고침을 받은 것은 엘리사의 권능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참조. 행 3:12, 16). 엘리사는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마음도 전혀 없었습니다. 나아만이 재차 강권했지만 엘리사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그러면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흙으로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나아만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람의 신 림몬을 숭배했습니다. 그 림몬에게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을 것이고 림몬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에게 기도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의 은혜로 나병을 치료받자 이스라엘 외에 다른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왕하 5:15) 이제부터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는 제사를 드리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왕하 5:17).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아람 왕이 림몬의 신전에 들어가 경배할 때 나아만이 그를 부축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림몬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나아만이 그것을 거절하면 그는 모든 지위와 명예를 잃게 될 것이고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만은 여호와께서 용서해 주시기 원한다고 엘리사에게 호소를 했습니다(왕하 5:18).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겠는데 부득이한 경우가 있으니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섬기지는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관리 중에서 많았는데 그들은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 자신이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요 12:42). 출교란 '회당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이는 곧 유대 사회에서의 추방을 의미합니다. 출교를 당한 자는 회당의 출입은 물론이고 같은 유대인과의 교제나 매매가 금지되는 등 이방인과 세리처럼 취급을 당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두려워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요 9:22). 일면 이해는 되지만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바벨론의 총리였던 다니엘은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을 알면서도 전에 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단 6:10). 그 기간이 한 달이었는데(단 6:7), 그동안 기도를 쉬든지 몰래 숨어서 했으면 무사히 넘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집 윗방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의 친구들 역시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용광로에 던져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몸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처럼 부득이 한 사정을 호소하며 신상에 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습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친구들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바벨론의 고위 관료들이었습니다(단 2:48, 49).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자신들의 지위와 명예는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멈추거나 우상에 절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실 것이라 믿었지만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타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단 3:18). 신앙에 있어서 타협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3. 참된 신앙은 탐심을 멀리합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주인이 병을 고쳐주고도 나아만이 주는 예물을 하나도 받지 않자 화가 났습니다. 나아만이 가져온 예물은 오늘날의 가치로 최소 수십 억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거절했으니 게하시는 못내 아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곧 탐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에게서 뭐라도 얻어와야 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뒤쫓아 갔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이름을 팔아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챙겼습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어디를 갔다 왔냐'고 묻자 그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탐심에 눈이 어두워진 게하시는 나아만을 속였고 엘리사까지 속이려 했습니다. 나아만은 속았지만 엘리사는 속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속이려 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 게하시는 나아만 대신 나병환자가 되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왕하 5:25-27). 이렇듯 탐심은 우리를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고 불행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죄의 근원은 탐심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했습니다(골 3:5). 탐심은 하나님보다 돈이나 물질에 더 관심을 갖게 하고 그것을 더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에 일종의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우리도 신앙보다 물질에 더 관심을 갖게 되면 게하시처럼 혹은 가룟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탐심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갈 5:24).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탐심도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참된 신앙의 길을 걷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