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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마태복음 강해 : 언약의 피

2023. 5. 3.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26장 17절 ~ 29절 [개역개정]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설교문 보기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사건 이후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로 갔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마 12:14 ; 마 26:3) 마침 유다가 예수를 넘기려 하자 기뻐하며 그 대가로 은 삼심을 달아 주었습니다(마 26:15). 은 삼십은 종이나 노예의 몸값으로(출 21:32)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선지자가 아닌 종이나 노예처럼 하찮은 존재로 평가절하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막 14:12)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와 함께하는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6:21). 예수님은 그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요 6:64). 그럼에도 그를 제자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 13:18). 다윗이 시편 41편(9절)에서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시 41:9). 실제 다윗의 신하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모반에 가담했던 아히도벨입니다. 그는 다윗의 모사(삼하 15:12)로서 왕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다윗이 신임했던 인물이었는데, 그런 그가 다윗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나 다윗에게 등을 돌린 아히도벨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 출신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을 배반했으며, 후에 모두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을 했습니다(삼하 17:23 ; 마 27:3-10). 그런 의미에서 다윗을 배반한 아히도벨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예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했습니다. 3년여 동안 함께했던 동료가 스승을 배반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고 슬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유다는 동료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가룟 유다와 같은 자들이 늘 있습니다. 그들은 사탄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듯(고후 11:14)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마치 의의 일꾼인 양 다른 사람들을 속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그 정체는 드러날 것이고(딤전 5:25 ; 히 4:13)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후 11:15).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시는지 몰라 저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그릇은 '카로셋(חֲרֽוֹסֶת)' 이라는 소스가 담긴 대접으로 추정되며, 여기에 무교병을 찍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식사 때는 함께 한 사람들이 모두 그 그릇에 손을 넣어 찍어 먹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주님(κύριος)이라 칭했는데, 유독 가룟 유다만은 랍비(ῥαββί)라 불렀습니다. '랍비'란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가룟 유다가 이 호칭을 사용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때로는 예수님을 랍비라 부르기도 했습니다(막 9:5 ; 11:21 ; 요 4:31 ; 11:8). 하지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자리에서 혼자 랍비라 하는 것은 그가 평상시에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도, 그리스도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단지 여러 랍비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다를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만 하셨습니다. 유다를 배려하는 동시에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능청스럽게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했다'고 대답하실 뿐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궁금한 건 못 참는(?) 베드로가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 여쭤보라고 했습니다(요 13:24, 25).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빵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시며 가룟 유다에게 그것을 주셨을 뿐 끝까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마 26:24).

이후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요 13:30). 이때가 만찬 도중이었는지 아니면 만찬이 끝난 후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는데, 여러 정황상 만찬 도중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간 것은 이른바 성만찬이 시작되기 전이라 보는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후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하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그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잔이란 그 속에 담긴 포도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를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했는데(눅 22:2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에 모세는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소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취하여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했는데(출 24:8) 이 피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언약의 불변성입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바(창 9:4, 5) 희생 제사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체결할 때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사용한 것은 당사자 간에 언약을 확실히 하기 위한 증표였습니다. 만일 그 약속을 어기는 자는 생명의 근원인 피를 흘려야만 한다는 것으로 약속의 파기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러한 행위는 언약의 불변성 즉 하나님의 언약이 결코 변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죄 사함입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모세가 피를 취하여 단과 백성에게 뿌릴 때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물과 함께 섞은 다음 붉은 양털과 우슬초에 적셔서 언약이 적혀 있는 두루마리와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히 9:19). 여기서 물과 양털과 우슬초는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사람이나(민 19:1-22) 나병 환자(레 14:4-6, 49-51)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 그런 방법으로 피를 성막과 제사에 쓰이는 모든 물건에도 뿌렸습니다. 이처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해지며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히 9:22).

첫 언약인 율법 아래에서는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짐승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며(히 10:4), 그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완전해질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 단번에 깨끗하게 되어 계속해서 제물을 바치지도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히 10:2). 그러나 율법이 정한 제사는 해마다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할 뿐 죄를 깨끗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율법이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히 10:1). 그림자는 실체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적 성격을 띤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잠정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자는 실체가 오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옛 언약이 정한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이기 때문에 율법이 정한 제사로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히 9:12). 이제 누구든지 그의 속죄를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모세나 제사장 같은 중보자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히 9:15).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로 갈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요 14:6). 만일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다른 길이나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피를 쏟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요 1:12)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며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요 5: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분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딤전 2:5).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행 2:21 ; 롬 10:13).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10:14).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바울이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피로 새 생명을 얻은 새 언약의 일군(고후 3:6)으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