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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2023. 5. 7.
성경본문 보기

룻기 1장 15절 ~ 18절 [개역개정]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설교문 보기

미국 사람들이 애창하는 노래 가운데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이 있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으로 번역되어 교과서에 실릴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곡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미국의 존 하워드 폐인(John Howard Payn)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가정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 뿐이리'. 그리고 이 노래의 서문에는 '쾌락과 궁궐 속을 다닐지라도, 아무리 초라해도 내 집과 같은 곳은 없다'고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곡을 쓴 존 하워드 페인은 가정을 가져 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집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정이 무엇보다 소중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런 가정을 꿈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홈 스위트 홈'은 사실은 전혀 즐겁지 못함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반어법인 셈이죠. 겉으로는 즐거워 보여도 불행한 가정이 있는가 하면 겉모습은 초라해 보여도 행복한 가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의 가정은 어디에 속할까요?

1. 신앙을 떠나 불행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 흉년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신 11:13, 14). 반면에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면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신 11:16, 17). 따라서 흉년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들을 섬기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징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엘리멜렉은 흉년이 들자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 밖에서 산다는 것, 그것도 우상숭배의 나라에 살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살면서 신앙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데 우상을 섬기는 이방나라에 살면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엘리멜렉은 신앙보다 안정된 삶을 택했습니다. 물론 흉년이 끝나면 돌아오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안정된 삶을 바라고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왔건만 그 바람은 이내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엘리멜렉이 죽은 뒤 두 아들은 모두 모압여자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말론은 룻(4:10)을, 기룐은 오르바를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아예 그곳에 정착해 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곳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들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두어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건강입니다. 말론이란 이름의 뜻은 '병든'이고, 기룐은 '쇠약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이름에 장래에 대한 부모의 소망을 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서나 야곱처럼 태어날 때의 상황이나 아이의 특징으로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다'는 뜻으로 온몸이 불그스름한 털로 덮여 있어서 지은 이름이고,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다'는 뜻으로 태에서 나올 때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엘리멜렉이 아들들의 이름을 병든 혹은 쇠약한의 뜻을 가진 말론과 기룐으로 지었다는 것은 그들이 태어날 때 건강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말론과 기룐이 단명한 것은 건강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구약성경을 시리아로 번역한 성경[시리아역/페쉬타]에는 그 이유를 이방인 아내를 얻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이 이방인 아내를 얻어서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들의 날 수가 단축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가나안 사람들과의 결혼을 금지한 규정이 있는데(신 7:3)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모압 사람들과의 결혼을 금지한 규정은 없지만 그들 역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려고 할 때 그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 했기 때문에(신 23:4)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을 영원히 금지시켰습니다(신 23:3). 따라서 하나님의 성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과 결혼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후에 나오미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룻 1:13)고 한 것으로 보아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엘리멜렉이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뒤로한 채 우상의 땅 모압으로 가서 거주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흉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엘리멜렉 한 가정만이 아닙니다. 그의 고향 베들레헴 혹은 이스라엘 전체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이방 땅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 이스라엘이 흉년으로 고난을 겪게 되었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흉년이 지날 때까지 형제들과 함께 자기의 기업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떠났다 해도 모압 지방으로 간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모압과 인접한 이스라엘의 르우벤 지파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정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사람이었다면 잠시일지라도 그렇게 쉽사리 우상을 숭배하는 모압 사람들 틈에서 살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나오미의 가정은 신앙을 떠났다가 불행한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주위의 환경이나 개인적인 어려움 등으로 신앙을 떠나 세상을 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시련이 왔다고 엘리멜렉의 가정처럼 신앙밖으로 나가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 시련의 때야 말로 믿음을 연단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숙해지고 우리의 가정은 믿음 안에서 더욱 든든해질 것입니다(엡 4:13).

2. 신앙의 여인을 만나 희망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죽고 이제 남은 것은 나오미와 두 며느리뿐입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모압 땅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나오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며느리 룻과 오르바 역시 시어머니와 함께 이스라엘로 가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는 도중 며느리들을 친정으로 보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나오미는 그들에게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가정을 꾸리고 평안히 살라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함께 이스라엘 땅으로 가기 원했습니다. 그만큼 고부사이가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삿 1:8).

시어머니가 계속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자 오르바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더러, 어머니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니를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저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묻힐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에 만일 제가 어머니 곁을 떠나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무서운 벌을 내리시기 원합니다."(삿 1:16, 17) 룻은 젊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혼도 아니고 사별이었기에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이는 어떤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룻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더욱이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인척관계로 혼인의 취소 또는 이혼, 사망 등의 사유가 생기면 자동으로 그 관계가 끝나버립니다. 따라서 룻과 나오미는 법적으로 남남입니다. 그럼에도 나오미를 어머니로서 공경하겠다는 것은 그의 효심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이러한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룻이 모압을 떠나 이스라엘로 간다는 것은 무엇보다 개종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이고, 모압은 이방신들을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자기 고향과 식구들 그리고 친척들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이방인으로서의 불편함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더욱이 과부는 사회적으로 고아나 나그네와 같이 천대받기 쉬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바꾸고 종교를 바꾸고 고향 식구들과 이별하면서까지 다른 민족 사람들 속에서 그것도 가난한 과부로서 시어머니를 봉양하겠다는 룻의 결심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룻은 우상을 섬기던 이방여인이었지만 나오미의 가정에 시집을 온 후 신앙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시댁 식구들 특히 시어머니가 보여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룻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룻은 비록 남편이 죽었지만 그런 시어머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고 그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수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가서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시어머니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 순간 룻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신앙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오미의 가정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가문의 대를 잇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윗 왕의 조상이 되는 영예도 얻게 되었습니다. 룻으로 인해 나오미의 가정은 불행한 가정에서 희망의 가정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결혼이 그렇습니다. 결혼은 당사자 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가정의 문제이며 크게는 가문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합이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이 된 것은 아내 이세벨의 영향이 컸고(왕상 21:25), 남유다의 여호람 왕이 아합의 집안사람들처럼 악을 행하고 여호와께 범죄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왕하 8:18).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특히 미혼자들은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하고 부모는 사위나 며느리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러시아 속담에 ‘전쟁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결혼은 중요하고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사자는 물론이고 자녀를 둔 부모는 그들의 결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3. 신앙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온 마을이 그들로 인해 떠들썩했습니다. 10여 년 만에 나오미가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며느리와 단 둘이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정말 나오미냐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나의 기쁨'이란 뜻이고 마라는 '괴로움' 혹은 '쓴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5장(23)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한 지역에 이르러서는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자 그 이름을 마라라고 했는데 나오미가 말한 마라와 같은 의미입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을 떠날 때 가진 것이 많았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고 재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끝날 때까지 모압에서 어려움 없이 살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남편도 아들들도 모두 잃고 빈턱털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고 그분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셨는데 어떻게 자신을 '나의 기쁨'이란 뜻의 나오미라고 부를 수 있냐는 것입니다(룻 1:20, 21).

하지만 나오미에게는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지혜롭고 헌신적인 여인 룻이 함께 있었습니다(룻 4:15). 잠언에서 말하는 진주보다 더 귀하고 값진 현숙한 여인(잠 31:10)이 바로 룻이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결혼법에 따라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와 재혼을 했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마을 유지에다 덕망이 높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들을 축복했습니다(룻 4:11, 12). 그리고 룻이 아들을 낳자 마을 여인들은 아이의 이름을 오벳이라 지었는데, 오벳은 '섬기는 자'란 뜻으로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섬기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이렇듯 나오미의 가정은 신앙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신앙을 떠나 불행했던 가정이 신앙의 여인 룻을 만나 희망의 가정으로 바뀌었고 이제 신앙 안에서 더없이 행복한 가정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였습니다(룻 4:14).

사랑하는 여러분! 궁궐과 같은 큰 집에 산다고 모두 행복한 가정은 아니고 움막과 같이 초라한 집에 살고 있다고 다 불행한 가정도 아닙니다. 어디서 사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가정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던 시절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불쌍하고 불행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 10)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고전 15:48). 그래서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들일 것입니다(고전 15:19). 하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빌 3:20). 그런 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가정이 가장 행복한 가정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찬송가 559장의 가사처럼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는 가정, 예수만 섬기는 가정이 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