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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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4장 1절 ~ 7절 [개역개정]
1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제이년에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된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4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5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6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7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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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 요아스 2년에 유다의 왕이 된 아마샤는 아버지 요아스와 동일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으나 오직 산당들은 제거하지 않았고 후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다가 무리의 반역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면 아마샤의 행적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함께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1. 남겨둘 것인가 제거할 것인가
아마샤는 왕위에 오른 후 그의 부왕을 죽인 신하들을 처형했습니다. 부왕인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의 아들 스가랴를 살해했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신하들 곧 암몬 여인의 아들 사밧과 모압 여인의 아들 여호사밧(여호사바드, 왕하 12:21)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대하 24:25, 26). 아마샤는 이 둘을 처형했는데,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고대의 관습에 의하면 반역자의 가족은 모두 사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는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신 24:16). 따라서 자식이 지은 죄 때문에 부모를 죽일 수 없고,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습니다. 아마샤는 이 율법에 따라 그의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은 처형하되 그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왕하 12:2). 하지만 아마샤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는 않았습니다(대하 25:2). 그는 아버지 요아스가 그랬던 것처럼 산당들을 제거하지 않음으로 불신앙의 씨앗을 남겨두었습니다(왕하 14:4). 그래서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했는데, 이는 언제든지 여호와 신앙에서 돌아설 수 있음을 암시했습니다.
산당은 이방 종교에서 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높은 언덕이나 산의 정상에 만들어졌습니다(민 22:41 ; 왕상 11:7 ; 14: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산당을 모두 헐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민 33:52). 물론 성전이 없던 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삼상 9:12 ; 왕상 3:2, 3). 하지만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된 이후 산당 제사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습니다(신 12:13, 14). 그럼에도 대부분의 왕들은 산당들을 제거하지 않았고 백성들 가운데는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왕하 12:3 ; 14:4 ; 15:35). 산당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마(בָּמָה)'는 '높은 곳'이란 뜻입니다. 보통 구릉이나 산의 정상 등 높은 장소에 세워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높은 곳에서 제사를 드리려는 이유는 하늘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만큼 제사가 신에게 상달될 가능성이 높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으로 미신적인 요소가 다분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한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온전한 마음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다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혼합주의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혼합주의 신앙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동시에 우상도 섬기거나(왕하 17:33)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혼합주의 신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미가의 가정입니다.
미가는 어느 날 어머니의 돈 은 천백 개를 훔쳤습니다. 이에 미가의 어머니가 그 돈을 훔친 사람을 저주하자 미가는 겁이 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저주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저주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돈을 훔쳤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러자 미가의 어머니는 그를 책망하는 대신 오히려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삿 17:2). 이는 미신과 관련이 있는데 저주는 그에 상응하는 복을 빌어 주어야 풀린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미가의 어머니가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그를 축복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대의 주술적인 미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후에도 그의 미신적인 행동은 계속됩니다. 미가가 훔친 돈을 돌려주자 어머니는 그 돈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들을 위해 한 신상을 만들려는 것이었는데 아들이 저주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을 만들면서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표현으로 여겼습니다(삿 17:3).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유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한 레위 사람이 새로 거주할 곳을 찾다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미가는 그 레위 사람에게 자기를 위하여 제사장이 되어 줄 것을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해마다 은 열과 의복 그리고 먹을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의식주를 제공해 주고 약간의 돈까지 주겠다고 하니 거주할 곳이 없었던 레위 사람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미가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에 미가가 하는 말은 참으로 가관입니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미 17:13)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레위 지파 가운데 아론의 자손만이 할 수 있었으며(출 28:1), 그것도 어느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절차에 따라 해야 했습니다(출 29장). 그럼에도 미가는 돈으로 레위 사람을 고용한 후에 그를 자기 임의대로 제사장으로 세웠고 그러한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가가 단지 레위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혹은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기복주의 신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이란 한 마디로 신앙의 목적을 복에 두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도 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때로는 복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 복이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복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는 미가의 가정처럼 돈이 많은 부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린 자가 복이 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눅 6:20, 21). 이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복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러한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혼합주의 신앙과 기복주의 신앙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사실만 강조하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신앙적 열심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혼합주의 신앙, 기복주의 신앙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각자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호 6:3).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아스나 아마샤처럼 산당을 제거하지 않음으로 불신앙의 불씨를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언젠가 엄청난 불길이 되어 우리의 신앙을 가로막을 것이고,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은 철저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는 그것을 통해 계속 우리를 유혹해 올 것입니다.
2. 따를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
아마샤는 에돔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군사를 소집했습니다. 이십 세 이상으로 전장에 나갈 수 있는 자를 세워보니 삼십만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은 백달란트로 이스라엘 용병 10만을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데리고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곧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대하 25:7).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패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도 덧붙였습니다. 이에 아마샤는 갈등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군인을 고용하기 위해 지불한 은 백달란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자니 백달란트가 아깝고 거역하자니 패전이 두려웠습니다. 아마샤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갈등하고 있는 아마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대하 25:9).
아마샤가 겪은 갈등은 우리 신앙인들이 흔히 경험하는 물질적인 시험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로 신앙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마 13:22 ; 막 4:19).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마귀의 시험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 인용하신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생활 동안 먹은 만나와 관계가 있습니다. 만나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주신 양식입니다(출 16: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만나를 주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특별한 방법으로도 사람들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만나는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처럼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 신앙에서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또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란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3. 잡을 것인가 놓칠 것인가
아마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용병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그의 백성을 이끌고 에돔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했습니다(왕하 14:7). 하나님의 사람이 전한 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일 자손의 신들 곧 에돔의 우상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삼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을 하므로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대하 25:14). 이에 한 선지자가 아마샤에게 와서 그를 책망합니다.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대하 25:15) 그러자 아마샤는 도리어 화를 내며 선지자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아마샤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처럼 배은망덕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위협까지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으므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회개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마샤에게 선지자를 보내 경고하신 이유는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대하 24:19 ; 36:15). 하지만 아마샤는 그 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놓쳤습니다. 그 결과 아마샤는 북이스라엘과 전쟁에서 크게 패했고,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라기스로 피했다가 거기서 반란군에게 잡혀 죽음을 당했습니다(왕하 14:19).
하나님께서는 천 년을 하루 같이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8). 회개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붙잡지 않고 외면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풀무 불에 던져져 거기서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마 8:12 ; 13:4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신앙의 불씨, 신앙의 장애물을 남겨둘 것인가 제거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 회개 혹은 복의 기회를 잡을 것인가 놓칠 것인가.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이고 그 책임 역시 여러분이 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 그릇의 음식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처럼 현실 문제에 급급해서 신앙을 포기하는 망령되고 어리석은 행동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히 12:16). 삶과 신앙의 기로에서 항상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