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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 금하지 말라

2023. 6. 28.
성경본문 보기

마가복음 9장 38절 ~ 50절 [개역개정]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대부분 유대지역 사람들이 천대하는 갈릴리 출신이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들로 인식되었습니다(요 17:15 ; 행 4:13).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어떤 낯선 사람을 보고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만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았으며, 또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는 관용이 없는 편협한 신앙과 특권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울은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라고 권면했는데(빌 4:5) 관용이란 남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으로(행 24:4 ; 고후 10:1) 어느 특정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불신자들, 심지어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단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행위를 금했고 마치 자신들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막 9:40 ; 눅 9:50). 귀신을 내쫓는 능력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만이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편협한 신앙이나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또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가려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인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곳을 지나가지 않고 우회로를 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좋지 않은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인으로 종교뿐만 아니라 생활까지도 혼합이 되어 버렸습니다(왕하 17:24-41).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하며 멸시했습니다. 외경인 집회서에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마음으로 증오하는 민족이 둘 있는데, 세 번째 것은 민족이라고도 할 수 없다. 블레셋과 세겜과 사마리아에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다."(집회서 50:25, 26 ; 공동번역개정판). 심지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마귀의 자식과 동등하게 취급했다고도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멸시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자 그리심 산에 자신들 만의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대신 그곳을 신앙의 중심지로 삼았는데(요 4:9) 마카비 혁명 때 이 성전이 유대인들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갈릴리에서 유대로 혹은 유대에서 갈리리로 갈 때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지 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돌아서 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지도 않으셨고 그들에게 안 좋은 감정도 없으셨기에 그 지역을 지나는 것을 꺼려하지 않으시고 종종 그곳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요 4:4 ; 눅 17:11).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신 것이 아니라 그곳의 한 마을에서 쉬었다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 미리 준비하게 하셨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눅 9:53).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리심 산에 있는 자신들의 성전은 인정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만 가시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야고보와 요한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지금 야고보와 요한은 엘리야가 행한 것 같이(왕하 1:10, 12)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자신들을 거부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었고, 자신들에게 그렇게 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 역시 우월감과 특권의식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과 예수님의 제자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우월감이나 특권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열두 명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선택이었고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져야 할 것은 우월감이나 특권의식이 아니라 자신들을 택하여 제자로 삼으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희생하는 마음입니다(마 20:28).

한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50).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물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는 욥의 말처럼(욥 6:6) 음식의 맛을 내는데 기본이 되는 조미료가 바로 소금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금은 사람의 생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몸속에 있는 체액(혈액, 림프, 뇌척수액 등)의 0.9%가 소금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리면 소금을 보충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진해서 사망에 이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오늘날 보다 소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컸습니다. 왜냐하면 소금이 여러 면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당시 고기나 생선을 오래 동안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금에 절이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소금 가격이 급등했습니다. 고대에는 소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소금을 얻기 위해 자신의 딸을 판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대 사회에서는 '태양이 소금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거나 '태양과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는 시구가 있을 만큼 소금은 인류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음식입니다.

성경에도 소금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신약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소금의 특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소금은 맛이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격언 가운데 '한 가마니의 소금을 함께 먹어야만 참된 우정이 성립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소금을 먹는다'는 것은 소금처럼 변치 않는 우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고대 사회에서는 조약이나 동맹을 체결한 후에 변치 않는 소금처럼 계약을 지속하자는 의미에서 언약의 당사자들이 소금이나 소금에 절인 고기를 나누어 먹는 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소금언약'이라고 했는데, 소금처럼 결코 변하지 않는 언약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민 18:19 ; 대하 13: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맛을 잃은 소금'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즉 소금이 짠맛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막 9:50)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이스라엘의 사해 서남단에는 돌소금[암염]으로 이루어진 산이 있습니다. 이 지역이 소돔이란 도시가 있던 곳으로 추정이 되기 때문에 이 산을 '소돔산'(Har Sedom)이라 부릅니다. 이 산에서 나오는 소금은 돌과 섞여 있기 때문에 돌에서 소금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며칠 물에 담가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소금이 물에 녹아 돌과 분리가 되는데, 여기서 분리된 돌은 밖에 버려집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짠맛을 잃은 소금'이 바로 이 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사해 바다 근처의 소금은 마그네슘이나 석회 등의 불순물에 의해 맛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겨울비로 인해 성전 바닥이 미끄러워지면 그것을 뿌렸다고도 합니다. 요즘도 눈이 올 때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염화나트륨이나 염화칼슘을 뿌리기도 하는데, 이는 소금이 습기를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짠맛을 잃은 소금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신세가 됩니다(마 5:13).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금이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아무 데도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쓸모가 없는 존재 취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금처럼 신앙이 변질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살균 및 정화작용을 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미생물의 번식과 상처의 감염을 막기 위해 소금물로 신생아를 닦아주었습니다(겔 16:4). 이는 소금이 살균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금은 소화 작용을 돕기도 하고, 세포 속의 노폐물을 새 물질로 바꾸어 신진대사를 촉진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사회의 부조리를 척결하고 정화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책잡히지 않도록 말과 행실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행 2:47).

셋째, 소금은 맛을 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골 4:6).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과 같이 항상 적절하고 은혜스럽게 말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으면 짜서 먹을 수가 없고 소금을 너무 적게 넣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가 없는 것처럼 말도 상황에 맞게 적절히 그리고 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반대로 말을 잘못 사용하면 듣는 이로 하여금 커다란 상처를 주거나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서 기자는 혀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약 3:8). 말 한마디에 천양을 빚을 갚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에 패가망신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말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당시 제자들이 가졌던 편협한 신앙이나 우월감은 비단 그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규모가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같은 유대인들이면서 남부 유대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이 북부 갈릴리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요 7:5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런 편협한 신앙이나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것은 우월감이나 특권의식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 불러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희생하는 마음입니다(마 20:28).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또 소금이 자신을 희생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일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빌 2:4). 그런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