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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2023.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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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5장 1절 ~ 12절  [개역개정]

1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4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그 땅의 백성을 치리하였더라
6 아사랴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7 아사랴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8 유다의 왕 아사랴의 제삼십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9 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10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1 스가랴의 남은 사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2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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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의 여덟 번째 왕인 요아스부터 그의 증손자인 열한 번째 왕 요담까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으나 오직 산당들은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5장은 남유의 두 왕 곧 열 번째 왕인 아사랴와 열한 번째 왕인 요담의 행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왕이 남유다를 다스리는 동안 북이스라엘은 여섯 번의 왕위 교체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신앙의 교훈을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교만에는 멸망이 따릅니다.

아사랴는 웃시야(왕상 15:32)라고도 하며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마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으며, 스가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스가랴는 신앙에 관해 조언을 해주는 자문관으로 아사랴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사랴는 스가랴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찾았으며 그가 하나님을 찾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주셨습니다(대하 26:4). 아사랴는 영토를 확장하고 농업과 목축업을 발전시켰으며 군대를 양성하는 등 남유다를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또 신병기를 개발하여 방어를 튼튼히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대하 26:8),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대하 26:15).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사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교만해져서 악을 행하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가 어떤 악을 행했는지는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서 지냈으며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 나라를 다스렸다'(왕하 15:5)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역대하 26장에는 그가 행한 악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 한 것입니다(대하 26:16).

향단에 분향하는 일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대하 26:17).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입니다(민 16:40). 그럼에도 아사랴가 향단에 분향하려 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큰 죄입니다. 이에 대제사장 아사랴가 성소의 규례를 상기시키며 왕이 하려는 일을 제지하자 아사랴 왕은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 그때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사랴는 죽는 날까지 별궁에 격리되어서 살아야만 했는데(대하 26:21) 이는 아사랴가 교만한 결과입니다.

잠언 기자는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에는 멸망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사랴는 남유다가 강성해진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 낸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교만한 마음을 갖게 했고 그 교만은 자신이 뭐든지 할 수 있고 해도 된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를 무시하고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벧전 5:5).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분수에 지나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우리를 존귀하게 하지만 교만은 우리의 인생을 멸망으로 인도할 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잠 16:18 ; 18:12).

2.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의해 멸망하기까지 모두 19명의 왕들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왕들을 배출한 가문은 예후입니다. 예후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당시 왕이었던 요람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후 아합 가문을 멸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왕하 10:30)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대로 예후 가문은 14대 왕인 스가랴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왕하 15:12).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그의 자손이 4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을 것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비록 그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지 않고 여느 이스라엘 왕들처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지만(10:29, 31) 아합의 가문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바알의 신당과 목상을 헐고 바알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등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렇게 해 주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예후 가문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본인을 포함해 5대에 걸쳐 가장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성경에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들 혹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재림입니다. 세상 사람들 혹은 거짓 선생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며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웃고 조롱할 것입니다(벧후 3:3, 4). 그들은 재림의 약속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죽었고 그 후로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으며, 그것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할 것입니다(벧후 1: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 14:3 ; 계 22:12, 20), 우리는 그 약속을 신뢰하며 그날을 소망하며 살이가고 있습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마 24:36)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딤후 4:1).

3. 신앙에도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아사랴는 아버지 아마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그러나 본받지 말아야 할 나쁜 행위까지 따라 했습니다. 아사랴의 아버지 아마샤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커녕 오히려 에돔의 우상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삼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을 하므로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대하 25:14). 이에 한 선지자가 책망하자 그는 도리어 화를 내며 선지자를 위협했습니다. 그 결과 아마샤는 북이스라엘과 전쟁에서 크게 패했고,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라기스로 피했다가 거기서 반란군에게 잡혀 죽음을 당했습니다(왕하 14:19). 아사랴는 이를 보고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자의 말로가 어떤지 말입니다. 하지만 아사랴는 아버지처럼 처음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으나 나라가 강성해지자 교만해져서 해서는 안 될 일 곧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 했고 이를 제지하는 대제사장에게 화를 내다가 나병에 걸려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요담은 아버지 아사랴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특히 그는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대하 27:2), 이는 아버지처럼 성전에서 분향한 일만큼은 따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요담은 아버지 아사랴가 성전에서 분향하려 하다가 나병에 걸렸던 사건을 거울삼아 나라가 강성할 때에도 아버지처럼 교만하지 않고 주제넘은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요담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한결같이 경건했으며 국정에도 세밀한 주의를 기울였던 왕이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버지처럼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산당은 이방 종교에서 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주로 높은 언덕이나 산의 정상에 만들어졌습니다(민 22:41 ; 왕상 11:7 ; 14:23). 그 이유는 하늘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만큼 제사가 신에게 상달될 가능성이 높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으로 미신적인 요소가 다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곳 즉 예루살렘에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 12:13, 14). 물론 성전이 없던 시기에는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삼상 9:12 ; 왕상 3:2, 3)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된 이후 산당 제사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을 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이나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달리 먼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제사하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부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부득불 거주지 근처에 있는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역대기 기자는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습니다(대하 27:2).

제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와 방법과 절차에 따라 드릴 때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런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 할지라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악한 일이며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요담이 아버지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성전에서 분향하려는 교만하고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도록 방치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좋은 것은 취했지만 나쁜 것을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본받되 방해가 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전통이요 관습이라 할지라도 단호히 제거해야 합니다. 신앙에 결코 타협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는 뜻이고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웃시야는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사랴는 그 이름대로 여호와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았고 강성한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만한 마음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아사랴의 아들 요담은 비록 개인적으로는 경건하고 열심 있는 신앙을 소유했으나 그것이 백성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제거해야 할 것을 그냥 방치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시작이 아무리 좋더라도 끝이 안 좋으면 전체를 버릴 수 있고 아무리 작은 누룩이라도 방치하면 전체를 부패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 제거하고 넘어질까 늘 조심하며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