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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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6장 10절 ~ 18절[개역개정]
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 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17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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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담이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하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올바르게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처럼 죄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바알 신상들을 부어 만들었으며(대하 28:2) 산당과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하고 분향했습니다. '푸른 나무'란 단순히 나무의 색이 푸르다는 말이 아니라 매우 크고 웅장한 나무를 의미하며 그 아래에서 제사하고 분향을 했다는 말은 자연을 숭배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더러운 풍습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암몬 사람들이 몰렉이란 우상에게 행하던 풍습이었습니다.
몰렉은 밀곰(왕상 11:5)이나 말감(렘 49:1, 3 ; 습 1:5) 혹은 몰록(행 7:43) 등으로 불렸는데, 그 형상은 놋쇠로 만들어진 사람의 몸에다 황소의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몰렉의 제사 의식은 모압 민족이 섬겼던 그모스처럼 자기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살아있는 아이를 불붙는 제단에 떨어뜨리거나 불 속을 통과하게 하는 방법이 주로 이용되었고(레 18:21 ; 렘 32:35), 불로 달궈진 우상의 팔에 아이를 안기는 방법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몰렉에게 자녀들 가운데 하나를 바치면 남은 자녀들은 모두 행운을 얻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단호하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레 18:21). 만일 몰렉에게 자식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그를 반드시 돌로 쳐 죽이되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않으면 그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끊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레 20: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들 중에는 아하스나 그의 손자 므낫세처럼 처럼(왕하 21:6) 자기 자녀를 몰렉에게 희생제물로 바친 왕들이 더러 있었습니다(참조. 렘 32:33-35).
이번 시간에는 아하스 왕의 행적과 그 주변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치기 위해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대하 28:5). 이 소식을 들은 아하스와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요약하면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정복하고 다른 사람을 왕위에 앉힐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사 7:4-9). 그리고 아하스에게 '한 가지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확인하고 싶으면 무엇이든지 좋으니 표적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표적 구하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만 진짜 속셈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아하스 왕은 이미 당대 최강국인 앗시리아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유다가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아하스는 앗시리아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앗시리아 왕의 신복임을 자처하면서(왕하 16:7), 많은 양의 금과 은을 가져다가 앗시리아 왕에게 예물로 보냈습니다(왕하 16:8).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은과 금도 포함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다는 부국강병한 나라였습니다. 아하스의 아버지 요담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대하 27:6). 그러나 아하스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함으로 유다는 앗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던 에돔과 블레셋까지 유다를 침공할 정도로 아하스 치하의 유다는 동네북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대하 28:17, 18). 만일 아하스가 처음부터 앗시리아 왕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했더라면 유다는 예전처럼 강병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인생은 결국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시 146:5). 그런 자들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2. 불의와 결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앗시리아 왕은 아하스의 요청을 듣고 올라와서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라는 곳으로 끌고 갔고 아람 왕 르신을 죽였습니다. 위기에서 벗어난 아하스는 앗시리아 왕이 머물고 있던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 있는 제단을 보고 그 제단의 설계도와 모형을 세밀하게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습니다. 그것은 규모가 큰 제단으로(왕하 16:15) 아하스는 크고 화려한 제단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 그가 보낸 설계도와 모형대로 하나님의 성전 마당에 제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돌아와 그 제단에서 각종 제사를 드렸고, 기존에 있던 놋 제단은 새 제단 북쪽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전 제사의 규례를 따르지 않고 성전 기구들의 모형과 그 위치를 임의대로 변경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패역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아하스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여호와 신앙에 앞장서야 할 제사장인 우리야는 오히려 아하스에게 동조를 했습니다.
우리야는 하나님께서 진실한 증인이라고 칭찬을 하셨던 제사장이었습니다(사 8:2). 그가 정말 신실한 자였는지 아니면 칼빈의 해석대로 제사장이란 직책 때문에 그렇게 불렸는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우리야는 우상의 제단을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일에 일조했고 아하스 왕이 성전 기구들을 임의로 변경하는데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등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했습니다. 이전의 아사랴 제사장은 웃시야 왕이 성전에서 분향하려고 할 때 용감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를 제지한 바 있습니다(대하 26:17, 18). 그와는 달리 우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기쁘게 했습니다.
이는 불의와 결탁한 것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자들을 가리켜 영적인 '소경이요 벙어리 개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사 56:10). 그들은 불의를 보고도 못 본체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과 결탁하여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사 56:11).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불이익이나 핍박을 받는다 해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거나 결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에 대해 지적하지는 못할 망정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의 편에 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3. 신앙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아하스는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새로 만든 제단의 북쪽으로 옮긴 후 제사장 우리야에게 '모든 제물은 새 제단에서 불사르되 오직 놋제단은 자신이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왕하 16:15). 비록 새로 만든 제단이 크고 화려해도 그곳에서 불태워지는 제물의 냄새는 향기가 아니라 악취에 불과합니다.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마음이 결여되었습니다. 그는 바알의 신상들을 만들고 산당과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하고 분향했으며 이방 민족의 가증스러운 풍습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등 우상숭배에 앞장을 선 자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아무리 크고 화려한 제단에서 수많은 제물을 드린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놋제단은 자신이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겠다고 하니 그 주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제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과 절차에 따라 드릴 때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런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 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 할지라도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악한 일이며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무엇보다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신 6:4)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선지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딤전 2: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요 14:6). 이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이며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옆길로 새지 않습니다.
4.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하스는 안식일에 사용하려고 성전에 만든 통로와 왕이 밖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전용 출입구를 옮겼습니다(왕하 16:18). 그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앗시리아 왕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원문에는 단순히 '앗수르 왕 때문에(מִפְּנֵי מֶלֶךְ אַשּׁוּר)'라고 되어 있어서 이를 '앗시리아 왕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혹은 '앗시리아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앗시리아 왕을 기쁘게 하기 위해'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의 왕으로서 하나님보다 앗시리아 왕을 더 두려워했고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더 살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의 기쁨을 더 구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갈 1:10) 아하스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종이 아님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28). 사람은 몸을 죽일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마 10:28 ; 눅 12:4, 5).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십니다(신 32:39). 또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 2:7).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으며 피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자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5. 신앙에 왕도는 없습니다.
아하스의 우상 숭배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고난을 당할 때 더욱 그러했습니다(대하 28:22). 당시 유다는 아람과 이스라엘, 에돔과 블레셋 등 주변국가들의 침략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다가 주변국들의 침공을 받아 어려움을 겪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하스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대하 28:19). 이에 아하스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자신의 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를 친 아람의 신들에게 제사하면서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자기도 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 그 신들이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도리어 망하게 되었습니다(대하 28:23).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기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지만(신 4: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들은 수시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으며, 그로 인해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거울삼아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신앙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다른 길은 없으며, 쉽고 편한 길 왕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길은 오히려 멸망의 길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마 7:13 ; 잠 14:1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이며, 환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시 3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평생 의지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도 남을 도울 수는 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대하 28:20). 특히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살아 계시고, 모든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며,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만 따라야 합니다. 그러한 자에게 소망이 있고, 그러한 자에게 기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