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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2023. 7. 27.
성경본문 보기

누가복음 1장 5절 ~ 17절 [개역개정]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앞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며 요단 강에서 세례를 베푼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마 3:1). 요한이란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 앞에 '세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동명의 사람들 즉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의 중심 사역이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기 때문에(막 1:4 ; 눅 3:3 ; 행 13:24) 세례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 요한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책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이 유일합니다.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 아비야 반열에 사가랴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엘리사벳도 제사장 가문인 아론의 자손이었습니다(눅 1:5). 두 사람은 나이가 많았지만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사가랴는 자기 반열의 차례가 되어서 제사장의 직분을 담당하게 되는데, 그가 맡은 일은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출 30:7, 8)이었습니다. 그가 분향을 하고 있는데, 한 천사가 나타나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천사는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한 가브리엘이었습니다(눅 1:19, 26, 27). 그는 스가랴에게 요한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고지해 주었습니다.

1. 나실인

'나실인'이란 일정 기간 혹은 평생 동안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구별된 사람(성별된 자, 민 6:2)'을 말합니다. 나실인에게는 지켜야 할 세 가지 규례가 있습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민 6:3). 당시의 대표적인 술은 포도주와 독주였습니다. 포도주는 포도의 즙을 내서 그것을 자연적으로 발효시켜 만든 것이고, 독주란 곡물이나 과일 등으로 빚은 독한 술을 말합니다. 술은 인간 속에 들어있는 악한 것들을 자극하여 그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쾌락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게 되면 실수를 많이 하게 되고(창 9:21 ; 사 28:7), 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엡 5:18). 그런데, 나실인은 포도주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소산물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즉 포도즙이나 생포도, 건포도, 심지어 씨나 껍질도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민 6:4).

이스라엘에는 포도 외에도 무화과나 석류 등 다른 과일들도 있는데, 왜 하필 포도에 대해서만 이렇게 엄격히 금하는 것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도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포도는 기쁨과 즐거움을 상징했습니다(전 10:19). 그래서 잔치를 할 때 포도주는 필수품목이었습니다(요 2:1-11). 동시에 포도는 쾌락을 상징하는 식물이기도 했습니다(호 3:1). 이러한 포도를 금지한 이유는 인생의 기쁨을 세상적인 것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거룩하게 살도록 구별된 자로서 삶의 기쁨을 세상에서 찾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민 6:5). 그럴 때 우리를 방탕으로 유혹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머리털을 자르지 말아야 합니다(민 6: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피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상징했으며, 아울러 힘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삿 16:17). 따라서 머리털을 자르지 않고 기르는 것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벧전 2:9)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 ; 빌 4:18).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마 5:16).

셋째, 시체와 접촉하지 말아야 합니다(민 6:6). 나실인은 그 정한 기간 중에는 비록 가장 친한 친지들 즉 부모나 형제, 자매 등이 죽었을지라도 그 시체와 접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민 6:7). 왜냐하면 시체는 죄악이 빚어낸 결과이므로(창 2:17 ; 롬 6:23) 의식상 부정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실인이 시체를 멀리해야 하는 것은 의미상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은 대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사항이기도 했습니다(레 21:11). 이런 조항을 왜 나실인에게 적용시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금지시킨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기 때문입니다(민 6:7). 즉 나실인의 긴 머리는 자신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표로 하나님의 소유됨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나실인의 긴 머리는 관유로 기름부음 받아 성별 된 제사장의 머리(레 21:12)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출 29:6 ; 슥 6:11).

나실인은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기간 동안은 대제사장처럼 하나님께 거룩한 자이기 때문에 그 몸을 자신의 유익이나 타인을 위해, 심지어 부모에게 조차 사용할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2. 선구자

마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고 했습니다(마 3:3).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했는데(사 40:3), 여기서 '광야에 외치는 자'란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처음 사역을 시작한 곳이 바로 광야였으며, 처음 외친 말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였습니다(마 3:2). 그리고 요단강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11 ; 막 1:4 ; 눅 3:3), 이를 본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생각을 했습니다(눅 3:15). 이에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요 1:20). 그는 단지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였습니다(사 40:3 ; 요 1:23). 그러니까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그분 앞에 먼저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의 선구자였던 것입니다(눅 1:76 ; 요 1:6, 7). 그가 사람들에게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요 1:31).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비하고 증거 한 선구자였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증거 하는 선구자라 할 수 있습니다.

3. 제사장

요한은 제사장 가문인 아론의 후손으로 그 역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2:21)를 위한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오신 이유는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를 극구 말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려 하실 때 "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며 사양한 적이 있습니다(요 13:8).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 주인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할 일이지 주인이 종의 발을,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죄인인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마 3:14). 이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히 4:15)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세례를 받으신 것은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구약의 절기인 속죄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속죄일이란 '죄를 속하는 날'인데 유대력으로 7월(태양력 9-10월) 10일에 지키는 절기입니다(레 23:27). 이 날 하루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일 년에 하루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속하고 또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를 성결케 하는 날이 바로 속죄일입니다. 속죄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세살 염소'입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속죄의 제물로 숫염소 두 마리를 받는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다른 한 마리는 백성들의 죄를 지고 광야로 내보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에는 목에 진홍생 끈을 감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에는 뿔에 진홍색 끈을 감습니다. 이 진홍색 끈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은 먼저 하나님을 위해 제비 뽑은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립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범한 죄를 속죄하기 위함입니다(레 16:15-17). 후에 대제사장은 아사셀을 위해 제비 뽑은 염소의 머리에 두 손으로 안수하고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냅니다. 유대인들은 이 염소를 '희생양(scapegoat)'이라 불렀습니다. 염소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전가시키기 위함입니다(레 16:21).

아사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한 문헌에 따르면 아사셀은 장소를 가리킵니다. 광야 끝에 아사셀이란 이름의 절벽이 있는데 그곳에서 아사셀을 위해 뽑힌 염소를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그 절벽은 높고 험준해서 염소가 땅에 닿기도 전에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 외에 다른 견해도 있지만 아사셀이 무엇을 가리키느냐 보다 아사셀을 위해 제비 뽑힌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보내져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실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대제사장의 안수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의 죄가 아사셀 염소에게 전가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를 통해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예수님께 베푼 세례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전가하기 위한 세례였습니다. 그리고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보내져 죽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세례에 비유하셨습니다(눅 12:50).

이렇게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에게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고후 5: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롬 3:24 ; 엡 2:8). 이것을 칭의(稱義 , 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 요한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이 나실인으로서 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의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고전 10:31). 또 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거 하는 선구자였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선구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이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벧전 2:5)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벧전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