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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2023. 7. 31.

 

성경본문 보기

열왕기하 18장 1절 ~ 12절 [개역개정]

1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9 히스기야 왕 제사년 곧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칠년에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10 삼 년 후에 그 성읍이 함락되니 곧 히스기야 왕의 제육년이요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제구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되매
11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12 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

 

설교문 보기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유다의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어떤 일을 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성전을 청결케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당시 유다 왕국은 선왕인 아하스의 불신앙으로 인해 종교, 경제, 국방 등 모든 면에서 나라 전체가 피폐해 있었습니다(대하 28:19). 아하스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이방신들의 도움으로 유다를 구해보려고 그들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대하 28:23). 더욱이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을 부수거나 내다 버리고(대하 29:19) 또 여호와의 성전 문들을 닫아 성전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대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았고 유다의 모든 성읍마다 산당들을 세워 다른 신들에게 제사하고 분향하도록 했습니다(대하 28:24, 25).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첫 단계로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에 착수를 했습니다. 그 내용이 역대하 29장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먼저 히스기야는 성전 문을 열고 수리를 했습니다. 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또 성전을 청결케 할 것을 명했습니다(대하 29:5).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성결케 해야만 했습니다(민 8:21, 22). 아마 그들 대부분은 제사장 우리야처럼(왕하 16:11) 성전에 더러운 이방신상들을 세우고 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에 동조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전을 청결케 하기 이전에 자신부터 성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그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명령대로 레위 사람들은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성 밖 기드론 골짜기로 가져다 버렸습니다(대하 29:16). 그들은 첫째 달 초하루에 성전을 성결케 하기를 시작해서 그 달 16일에 일을 마쳤습니다(대하 29:17).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이 끝나자 히스기야는 성읍의 대신들을 모아 성전으로 올라가서 번제와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대하 29:24) 백성들도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바쳤습니다(대하 29:31, 32). 이렇게 하여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29:35). 신앙이 다시금 새롭게 회복된 것입니다. |

우리의 신앙도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전이 더럽혀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함을 입어 성도가 된 사람들 자신과 그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말합니다(고전 3:16).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한 몸이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아하스 시대의 성전이 각종 우상들로 더럽혀졌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온갖 이단 사설(그릇되고 간사한 말 또는 올바르지 않은 논설, 엡 4:14)과 세상 풍조(전통이나 유행, 엡 2:2) 그리고 인생의 자랑 등으로 인해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으로 교회는 주인이신 하나님(고전 3:17)과 머리이신 예수님(엡 5:23 ; 골 1:18)만을 자랑해야지 그 외에 사람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심거나 물을 주는 것보다 자라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고전 3:7). 그럼에도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자랑하고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다가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분열이 되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과 교회를 더럽히고 분열시키는 요소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잘못된 교훈이나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바로 서고 우리의 신앙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2.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년 이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지만(민 9:2 ; 신 16:1 ; 왕하 23:21)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킨 이후(수 5:10) 아하스 왕 때까지 수백 년 동안 이 절기를 지켰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이르러 비로소 유월절이 지켜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히스기야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첫째 달 14일 저녁에 지키는 절기로 무교절의 첫날이라고도 합니다(막 14:12). 그런데 히스기야 왕과 그의 신하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은 둘째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전 청결 작업이 16일에 끝나(대하 29:7) 이미 유월절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백성들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대하 30:3).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전역에 명령을 내려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것을 넘어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대하 30:6). 이 명령은 남유다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에도 전해졌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로부터 6년 후 이스라엘은 멸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베가 왕 때 일부 성읍들이 앗수르에 의해 점령되었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적이 있습니다(왕하 15:29). 히스기야는 이를 상기시키면서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들에게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고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라고 하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만을 섬길 것을 호소했습니다(대하 30:8). 하지만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대하 30:11) 대부분 히스기야의 말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대하 30:10).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의무감이 아니라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이고 이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유월절을 지키라는 말에 비웃고 조롱했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것을 원치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지만(딤전 2:4) 끝까지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3.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둘째 달 많은 백성들이 유월절 행사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행사를 하기 전 예루살렘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상의 제단과 향단들을 모두 제하여 기드론 시내에 가져다 버렸습니다(대하 30:14). 성전 안에 있던 더러운 물건들은 이미 레위 사람들이 기드론 골짜기에 버린 바 있습니다(대하 20:16). 그리고 7일 동안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켰는데, 다시 일주 일을 더 지키기로 결정하고 그대로 행했습니다(대하 30:23). 그러니까 14일 동안 연이어 절기를 지킨 것입니다. 절기가 끝나자 백성들은 유다의 여러 성읍으로 돌아다니며 우상들을 파괴하고 산당과 제단을 없앤 후 각기 자신들이 거주하는 성읍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깨트렸습니다.

이 놋뱀이 만들어진 그때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3, 14장)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로 발길을 옮겨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38년이 지나 다시 가데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불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38 년 전 가데스에서의 아픈 추억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가데스는 에돔과의 경계지역으로,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이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데스에서 곧장 가나안에 들어가기보다는 가나안 동편으로 우회해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돔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가나안 동편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모세는 에돔 왕에게 그 땅을 통과하게 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에돔 왕의 거절로 이스라엘 백성은 지름길을 놔두고 또다시 고통스러운 광야 길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민 21:5). 이러한 원망은 거의 습관처럼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터져 나왔습니다(출 14:11, 12 ; 15: 23, 24 등).

사실 광야는 생활하기 힘이 들고 어려운 곳입니다. 그곳에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오직 끝없는 행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신 2:7).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셨고(출 16장), 반석에서 마실 물을 주셨습니다(출 17:6 ; 민 20:11; 신 8:15). 또 이스라엘 백성이 해어진 누더기 옷이나 닳은 신발을 신지 않도록(신 8:4) 가죽과 털을 공급해 주는 가축을 이집트에서 많이 가지고 나오도록 하셨습니다(출 12:35-38). 뿐만 아니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광야의 뜨거운 햇빛과 열기 그리고 질병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나 동물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출 13:21, 22). 이러한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 뒤에는 언제나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그곳으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생활을 하던 자신들을 해방시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습니다.

이렇게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불뱀으로 징계하셨습니다. 불뱀은 주로 아라비아 지역의 광야에 서식하는 등에 붉은 반점이 있는 독사의 일종으로 이 뱀에 물리면 즉시 온몸에 열이 생기며 극심한 고통과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광야는 항상 이러한 불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지만(신 8:15)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 불뱀의 위험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의 은혜를 멸시하므로 그들에게 불뱀들을 보내 징계하신 것입니다.

불뱀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자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여 뱀들에게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놋쇠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고 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바라보면 살아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자마다 그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민 21:9).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놋뱀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가져갔고, 히스기야 왕 때까지 수백 년 동안 그것에게 분향하며 숭배했습니다(왕하 18:4). 사실 놋뱀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었으며 교육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백성들은 놋뱀 자체에 어떤 능력이나 힘이 있는 줄로 생각했던 모양인데 놋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죽지 않고 산 것은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게 될 것이라(민 21:8)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 놋뱀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우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이 놋뱀을 산산조각을 낸 후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 명명했습니다(왕하 18:4) 느후스단이란 '놋 조각'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놋뱀은 단지 놋으로 만든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창 1:27) 하나님을 대신해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창 1:28). 그래서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놋 조각이나 피조물들의 형상을 만들어 신으로 숭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이며 나아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상들은 그것을 섬기는 자들에게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가져다줄 뿐입니다(대하 28:23). 우리는 우상들 곧 신앙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며(렘 10:10)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 가는 자가 살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요 3:14, 15).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행 4:12) 이 방법 외에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요 1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스기야는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의지했으며(왕하 18:5)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일을 처리하였습니다(대하 31:20, 21). 그 증거로 성전을 청결케 했고, 절기를 지켰으며, 우상들을 제거했습니다. 또 레위인들이 성전의 일에 전념에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대하 31:4). 이처럼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에 하나님을 찾았고 온 마음으로 그 일을 수행했습니다(대하 31:21).

하나님께서는 그런 히스기야와 함께 하셨고 그는 어디로 가든지 형통했습니다(왕하 18:7). 우리도 히스기야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록 말년에 마음이 교만하여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대하 32:25)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긴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처럼 우리는 하나님께만 매달려 그분을 떠나지 않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왕하 18:6). 그래야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