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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누가복음 강해 : 울지 말라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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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보기

누가복음 7장 11절 ~ 17절 [개역개정]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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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가장 큰 슬픔은 아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일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뿐인 가족과 헤어진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인성 가까이에 이르셨을 때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나인성은 예수님이 계신 가버나움(막 2:1 ; 마 9:1)과 같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도시로 그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하나뿐인 가족 그것도 아들을 잃은 과부는 슬피 울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과부는 고아와 나그네 곧 외국인과 더불어서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괴롭혀서도 안된다고 특별히 당부하실 정도로(출 22:21, 22) 그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나마 나인성 과부에게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느 과부보다는 형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 죽음으로 이제 다른 과부들과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인성 과부에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운명론적 말씀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인도의 한 마을에서 어떤 젊은 과부가 병으로 죽어가는 외아들로 인해 큰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석가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과부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석가는 과부에게 '한 번도 장례를 치러보지 않은 사람의 집에 가서 쌀을 가져가다 죽을 끓여 먹이면 살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과부는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즉시 마을로 내려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집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오후 늦게 빈 손으로 돌아온 과부에게 석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 것[生者必滅]이니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그에 순응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히 9:27).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아들을 살려 줄 것이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뿐인 가족이자 아들을 잃은 여인에게 '슬퍼하지 말라, 울지 말라'고 한들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슬픔의 원인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서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섰습니다. 이 관은 뚜껑이 없는 것으로 유대인의 장례 풍습에 따르면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수건으로 덮어서 뚜껑이 없는 관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는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레 22:4 ; 민 19:16). 성경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관을 만지시는 것을 보고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보통 랍비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중요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물론이고 랍비들조차도 꺼려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예수님의 율법을 초월한 사랑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치료하실 때도 그에게 손을 대신 적이 있습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부정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 이유는 그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에게 손을 대게 하신 것입니다(막 1:41).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그러자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신적인 권위에 대한 경외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말하기를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보고 엘리야나 엘리사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들 역시 죽은 자를 살린 적이 있는 선지자들이었습니다(왕상 17:17-24 ; 왕하 4:17-27). 하지만 엘리야나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린 것과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사는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그러한 이적을 행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세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사 9:6 ; 요 1:3). 그러기에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 상한 자를 낫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실 수도 있고(요 2:9), 바람과 바다도 순종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눅 8:25).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고 그저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위대한 선지자로만 생각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했습니다. '돌보다(ἐπισκέπτομαι)'라는 말은 의사가 환자가 있는 곳을 방문하여 진료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행 15:36).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의미입니다(말 4:2). 오랫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들을 돌보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로부터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세례 요한은 오히려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 물어보게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 세례 요한이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백성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막 1:4 ; 눅 3:3).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의미로,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오시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선포하기도 했습니다(마 3:12).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 요한은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고(3:13, 14 ; 요 1:33, 34),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요 3:34)으로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메시아가 오셨으니 곧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로마와 헤롯 그리고 그들과 타협한 유대의 지도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옥에 갇히고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심판에 대한 어떤 징조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제자들을 통해 들은 예수님의 행적은 심판의 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에게 '당신이 오시기로 한 그 메시아가 맞느냐'는 질문을 하게 한 것입니다. 요한이 의문을 가진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이 아니라 그분의 사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즉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여러 병자들과 악한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주고 계셨습니다(눅 7:21). 그리고 세례 요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이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사역으로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행하는 일들이 곧 메시아로서의 사역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영적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 볼 때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자가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던 자들이 그 말씀을 깨달으며,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마 1:21).

그런데 세례 요한은 현재 예수님의 모습과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다른 데서 그분의 사역에 대해 의심을 품었습니다. 세례 요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오해를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실족하게 됩니다(마 11:6 ; 눅 7:23). '실족하다'는 말은 '길 가는 도중에 어떤 것에 부딪쳐 넘어지거나 비틀거리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의심을 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에 대해 오해 혹은 의심하지 않으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목적도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않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아들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던 과부에게는 참된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역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에 대해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살전 4:13). 물론 함께 정들어 살고 있던 가족이나 친지가 죽으면 슬픈 것도 사실이고 안타까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나사로가 죽었을 때 슬퍼하셨고 눈물도 흘리셨습니다(요 11:33-35). 하지만 성도의 슬픔과 세상 사람들의 슬픔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는 슬픔 중에서도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불신자들에게는 그런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요 11:25)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어떤 슬픔도 이겨내며 기쁨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