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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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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9장 29절 ~ 34절 [개역개정]

29 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30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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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왕인 아하스 때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히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이 섬겼던 여러 우상들을 제거했으며, 우상 숭배의 중심지인 산당들을 폐쇄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올바르고 진실하게 행동했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찾고 온 마음으로 행했습니다(대하 31:20, 21).

히스기야는 친앗수르 정책으로 일관했던 선왕과 달리 친애굽으로 노선을 바꾸었습니다(왕하 18:7).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해서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읍들을 점령하자(왕하 18:13 ; 사 1:7, 8)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합니다. 앗수르 왕이 요구한 조공은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이를 마련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 창고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심지어 성전 문과 그 기둥에 입혀 있는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어야만 했습니다(왕하 18:16). 유다 여러 왕 중에서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왕하 18:5)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실하게 섬겼던 히스기야가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겼다고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혹자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한 것을 히스기야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믿음이 진실한지의 여부를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만나를 주실 때 몇 가지 사항을 지시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이 그 지시에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고 하셨습니다(출 16:4). 시험에는 ‘입증하다’ 혹은 ‘증명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여 보겠다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너희 믿음을 한 번 증명해 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나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한 양만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만나는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면 녹아버렸기 때문에 그전에 거두어야 했고(출 16:21) 먹을 만큼만 즉 한 사람당 한 오멜씩 거두어야 했으며(출 16:16) 아침까지 남겨두어서는 안 되었습니다(출 16:19). 이는 내일의 삶에 대한 걱정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의미입니다(마 6:34 ; 벧전 5:7). 그런데, 일부 백성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 두었습니다(출 16:20). 하지만 그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결국은 못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불순종에 대한 결과입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출 16:5). 여섯째 날에는 평일보다 두 배의 양 곧 한 사람 당 두 오멜씩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평일처럼 한 오멜씩 만나를 거두어도 그것을 되어 보면 두 오멜의 분량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출 16:22). 그 이유는 다음 날이 쉬는 날 곧 여호와의 거룩한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출 16:23).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굽든지 삶든지 하고 남은 음식은 다음날 먹을 수 있도록 아침까지 간수하라고 모세를 통해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남은 것을 다음날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그것에서는 냄새도 나지 않았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출 16:24).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침까지 남겨 둔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불순종에 대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에는 만나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이틀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출 16:29). 모세는 이 사실을 백성에게 알렸으나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만나를 얻지는 못했습니다(출 16:27). 그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 했지만 오히려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신앙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그것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고(신 9:7) 히스기야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조공으로 바치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은 조공을 받고서도 얼마 있다가 다시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치게 했습니다(왕하 18:17).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줍니다. 시편 기자의 말처럼 우리는 왕들이나 고관들처럼 권력 있는 사람,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으며 그분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시 146:3, 5). 그래야 사람들로 인해 실망하지 않고 배신을 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장수 가운데 하나인 랍사게는 유다의 대신들에게 앗수르 왕의 뜻을 전했습니다. 요약하면 '여러 민족의 그 어떤 신들도 자기 나라를 내 손에서 구해낸 일이 없는데 여호와라고 내 손에서 예루살렘을 건져낼 수 있겠느냐 그러니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히스기야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대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대신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왕하 19:6)

앗수르 왕 산헤립은 다시 편지를 써서 히스기야에게 보내어 하나님을 모욕하고 비방하며 항복할 것을 재촉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간구했습니다. 이때 이사야도 히스기야의 요청으로 함께 기도했습니다(왕하 19:2-4 ; 대하 32:20 ; 사 37:2-4). 히스기야의 기도 내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만 온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앗수르 왕들이 수많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신들의 우상을 불태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나무나 돌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이 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해 주소서. 그러면 온 세상 나라들이 주 여호와만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왕하 19:15-19)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응답해 주셨습니다(왕하 19:20 ; 사 37:21).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기도자에게 직접 말씀이나 꿈을 통해 응답하실 수 있고, 히스기야의 경우처럼 다른 사람을 통해 응답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또 바로 응답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응답해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예 침묵하시는 경우도 있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고(시 55:22)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시 37:5).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즉시 응답해 주셨습니다. 앗수르는 멸망할 것이며(왕하 19:28) 예루살렘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왕하 19:32, 34)는 응답이었습니다. 아울러 유다의 회복을 약속해 주시면서(왕하 19:29-31)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왕하 19:31).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약속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약 1:17).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신 7:9). '신실하다'는 말은 '신뢰하다' 혹은 '충실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한 번 하신 약속은 어기지 아니하시고 충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삼상 15:29).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멸하신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한 천사를 앗수르 진영에 보내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치게 하셨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이십만 명에 가까운 앗수르 군사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일이 없고,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실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한 것처럼 여호와는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산헤립은 이를 몰랐습니다. 앗수르가 여러 나라를 정벌하고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왕하 19:25).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삼으사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시며 하나님께 범죄 한 나라들을 거리의 진흙같이 짓밟도록 하셨습니다(사 10:5, 6). 그럼에도 산헤립은 자신과 그의 선왕들이 이 일을 행한 것처럼 교만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했습니다(왕하 19:16, 28). 이에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사를 치시자 산헤립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 나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섬기는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하다가 친 자식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대하 32:21).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몰락이 따른다'(잠 16:18)는 잠언 기자의 교훈처럼 천하를 호령하던 산헤립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것은 결국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들 그것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히스기야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받은 히스기야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습니다(왕하 20:1). 그러자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자신이 마음을 다하여 주를 성실하게 섬긴 일과 주 앞에서 선하게 살려고 했던 것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크게 통곡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15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고(왕하 20:6) 큰 부와 명예도 주셨습니다(대하 32:27). 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했습니다(대하 32:25). 즉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다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부와 영광을 자랑했던 것입니다(왕하 20:13).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내세웁니다. 그들은 주님을 자랑하기도 보다는 자신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들의 영화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만은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며 반드시 그들을 징계하신다고 하셨습니다(잠 16:5).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으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히스기야를 보면서 일평생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마 16:24).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바울처럼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고전 9:27). 자신의 몸을 친다는 것은 '얼굴을 멍이 들게 때리다'는 뜻으로 당시 권투 선수들이 상대방의 얼굴을 공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자신의 본성과 싸우기 위해 애쓴다는 의미입니다. 또 복종시킨다는 것은 '노예가 되게 한다'는 뜻으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 즉 자신이 내세울 만한 모든 것들(빌 3:5-7), 교만의 빌미를 제공하는 요소들을 배설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빌 3:8)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서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운동선수가 경기에서의 승리를 위해 고된 훈련을 감내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