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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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장 54절 ~ 13장 5절 [개역개정]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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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데 충분했습니다(요 2:23 ; 9:32-33). 그럼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그분을 믿지도 메시아로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께 또 다른 표적(마 12:38) 즉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원했습니다(마 16:2). 예를 들면, 모세 때 하늘에서 내렸던 만나(요 6:31)나 엘리야 때에 하늘로부터 내렸던 불(왕상 18:30-40)과 같은 이적 등을 말합니다. 그동안 행했던 것들로는 부족하니 더 큰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주신다고 해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표적을 요구한 것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마 16;1). 그동안의 기적들만으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더 큰 표적을 보여준들 그들이 믿을 리가 없습니다(눅 16:31).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2-3). 여기서 '시대'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이나 '시대'를 나타내는 용어가 여러 개가 있는데, '카이로스'를 비롯해 '아이온(αἰών)'과 '크로노스(χρόνος)' 그리고 '호라(ὥρα)' 등입니다. '아이온'은 '매우 긴 혹은 영원한 시간'을 뜻하고, '크로노스'는 보통 '일반적인 시간이나 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호라'는 '시간의 어느 한 시점'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예를 들면,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9)는 말씀에서 '시간'은 '호라'입니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정해진 시간이나 특정한 시대'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때가 찼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요한복음 7장 6절에 나오는 '때' 역시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주로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3절의 '시대' 역시 예수님과 관련됩니다. 즉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갈망했던 메시아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이란 그 시대에 일어날 혹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기적이나 이적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게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도착했을 때 마침 예수님께서는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고 계셨습니다(눅 7:21). 그리고 세례 요한의 질문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 5) 이 말씀은 구약의 예언된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언급으로 사 35장과 61장의 일부분입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 6)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 2)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것들입니다(참조, 사 29:18 ; 사 35:5, 6; 61:1). 예수님께서는 그런 예언들 특히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심으로써 자신이 그 메시아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사역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요 9:24).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다음날은 대체로 날씨가 맑습니다. 반대로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그날은 날씨가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가 좋은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면 그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의 지도자들은 날씨는 분별하면서도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 12:54-56)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경험적으로 그 지역의 날씨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서쪽에 있는 지중해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고 사막이 있는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더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마 20:12 ; 약 1:11).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천지의 기상을 분간하는 일이 아니라 시대를 분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입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기상의 변화에 매우 민감했습니다. 기상에 따라 한 해 수확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불의에 침묵하거나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특히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고(요 12:43)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인기 얻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마 6:1-2).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 '위선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2:56). 겉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경건한 척 행동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꾸미지만 그 속에는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눅 12:57-59)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채무를 졌는데 그가 나를 고소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법정에 서기 전에 그 채권자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화해하다(ἀπαλλάσσω)'’는 법률용어로 '고소자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행 19:12). 그러기 위해서는 채권자와 타협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가서 채무를 다 갚기 전에는 결코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법정에 서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롬 5:1).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처럼 심판의 법정에 서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늦지 않도록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막 1:15). 끝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때 어떤 사람들이 와서 당시 유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빌라도의 잔인함이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불쌍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죽임을 당해야만 했는가에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을 죄의 결과로 여겼습니다(욥 4:7 ; 8:20). 그래서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아마도 큰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빌라도가 희생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것이 저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실로암에서 있었던 사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을 것입니다. 실로암은 히스기야 왕 때 만든 연못으로, 이곳을 지키기 위해 망대가 세워졌는데, 이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 역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자신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들보다 자신들이 의롭기 때문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일들이 종종 기록되어 있습니다(삼하 21:1 ; 삼하 24:13).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9:3). 그러므로 어떤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을 무조건 죄와 연관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눅 13:5). '망하다'는 말은 '멸망하다', '죽다'는 뜻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지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마 25: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시대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경의 예언대로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어느 한 시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말세의 징조들이 더욱 빈번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5)고 하신 것처럼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마 24:11). 전쟁의 소식은 끝이 없고, 기상재해로 인해 전 세계가 난리입니다(마 24:6). 어느 지역은 홍수로, 어떤 곳은 가뭄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마 24:7). 또 세계 곳곳이 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있고,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징조들은 세계의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보여줍니다.
2000년 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세상에 오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딤후 4:1). 그날은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날이지만(히 9:28)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며, 슬기 있는 다섯 처녀처럼(마 25:4)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