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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세상에서 첫 영걸이며

2023. 9. 24.
성경본문 보기

역대상 1장 8절 ~ 16절 [개역개정]

8 함의 자손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9 구스의 자손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자손은 스바와 드단이요
10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세상에서 첫 영걸이며
11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2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으니 블레셋 종족은 가슬루힘에게서 나왔으며
13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과 헷을 낳고
14 또 여부스 종족과 아모리 종족과 기르가스 종족과
15 히위 종족과 알가 종족과 신 종족과
16 아르왓 종족과 스말 종족과 하맛 종족을 낳았더라

 

설교문 보기

노아에게는 셈과 함 그리고 야벳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홍수 이후 이들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와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창 10:32). 비록 노아의 식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어 홍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그들 역시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홍수 전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창 6:9)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노아가 전혀 죄가 없거나 흠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제아무리 의롭다 해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했습니다(전 7:20). 따라서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것은 당시 타락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래도 노아는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는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을 정도로(창 6:6)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한 때였습니다(창 6:5). 사람들의 생각은 언제나 악했으며, 그들의 삶은 완전히 부패했습니다(창 6:12). 이러한 시대에 노아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노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창 6:8).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노아의 식구들은 홍수의 심판으로부터 유일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홍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아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노아가 홍수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홍수 후에 그는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천막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창 9:21). 그가 고의로 술을 만들어 먹은 것인지 아니면 포도즙이 자연 발효되어 술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고의든 실수든 노아는 포도주를 마셨고 그것은 노아를 취하게 했습니다.

당대에 완전한 자라 칭함 받던 노아가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린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고 항상 신앙의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히 12:28).

그런데 노아의 실수는 실수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함의 자손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셈과 야벳에게 알렸습니다. 보통 가족끼리는 서로 흉이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 줍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함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라고 형제들에까지 부추김으로써 도를 넘어 죄악 된 행동을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는 것마저도 가정 윤리를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함의 행동은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한 처사이며, 나아가 가정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볼 때 함의 행동을 알게 된 노아가 그를 저주한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잘못은 함이 했는데 노아는 함이 아닌 그의 아들을 저주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25). 왜 노아는 함이 아닌 그의 아들을 저주했을까요? 이에 대해 노아가 벌거벗은 것을 처음 본 사람이 가나안이었고 그 사실을 아버지 함에게 알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함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들이 저주받은 것은 자신이 저주받은 것 이상의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저주는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솔로몬 왕 때 가나안 족속인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그리고 여부스 사람 중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왕상 9:20-21). 그렇다고 이것이 단지 노아의 저주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 18장에 보면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20)고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단순히 함의 잘못 때문에 그의 아들 가나안과 그의 후손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죄악을 범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창 15:16).

반면에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9:26-27) 셈과 야벳이 축복을 받은 이유는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않고, 옷으로 덮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합당한 자라고 인정받았던 다윗도 실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셈과 야벳처럼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거나 비난하지 말고 덮어 주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구원함을 얻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한편, 함의 후손들 중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니므롯입니다. 니므롯은 함의 장자인 구스의 아들로서 그 이름은 '반역' 혹은 '배반'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반역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마라드(מָרַד)'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요? 보통 이름에는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자녀가 반역의 사람이 되라는 듯 그 이름을 니므롯이라고 지었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자기 동생에게 내려진 저주에 화가 구스가 자신의 막내아들인 니므롯에게 세상을 지배할 힘과 능력을 키우도록 하기 위해서 '반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니므롯이 그의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니므롯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부추겨 반역하는 일에 나서도록 '니므롯(반역)'이란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이 그 구호를 그의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살의 책에 보면 구스가 아들의 이름을 왜 니므롯으로 지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살의 책이란  여호수아나 다윗의 행적을 기록할 때 인용했던 책입니다(수 10:13 ; 삼하 1:18). 그 책에 보면 구스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니므롯이라 부르며 말하기를 그 때에 사람의 아들들이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고 범죄하기 시작했다"(7:23)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니므롯은 당대의 상황을 반영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이름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셈의 후손 가운데 '벨렉'이란 사람이 있느데, 그의 아버지 에벨이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해서 이름을 '나누다'는 뜻의 벨렉이라고 한 것입니다(창 10:25 ; 대상 1:19).

그리고 성경은 니므롯이 '세상에서 첫 영걸'이라고 말합니다(대상 1:10). '영걸(גִּבּוֹר)'이란 '용사'(창 10:8)란 뜻으로 '힘이나 영향력이 강한 자'를 의미입니다. 홍수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역시 용사들(גִּבֹּרִים)로 불렸습니다(창 6:4). 그러니까 니므롯은 홍수 이후 세상에 처음 나타난 용사였습니다.

또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홍수 이후 아라랏(창 8:4) 근방에 거주하던 노아의 후손들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시날 평지에 이르러 그곳에 정착을 했습니다(창 11:2). 시날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에 있는 지역으로 땅이 비옥해서 농사를 짓기에 적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들의 안전에 위협이 될 만한 들짐승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때 니므롯이 나타나 들짐승들을 잡기 시작했고, 그는 사람들 사이에 용감한 사냥꾼으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습니다(창 10:9). 사람들은 니므롯을 따르게 되었고, 니므롯은 그들의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니므롯의 주도하에 사람들은 시날 지역에 있는 바벨과 그 주변에 도시들을 건설하고 그 가운데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쌓으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이런 탑을 쌓으려는 목적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창 11:4).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후손들에게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벽돌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바벨탑을 건설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높은 탑을 쌓으려는 또 하나의 목적은 서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창 11:4).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마치 반항이라도 하듯 '흩어짐을 면하자'는 슬로건 아래 도시들을 건설하고 탑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홍수가 다시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높은 탑을 쌓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이후 두 번 다시 홍수에 의해 땅을 멸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증표로 주신 것이 무지개입니다(창 9:11-16). 홍수를 경험한 노아의 식구들이나 그의 후손들은 비가 오는 것을 보면 또다시 홍수에 의한 심판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노아의 후손들은 다시 홍수가 있을 것을 대비해서 높은 탑을 쌓으려 한 것입니다. 이는 결국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사 14:14).

마지막으로 그들이 높은 탑을 쌓으려는 이유는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바벨탑을 지구라트(Ziggurat)의 원형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구라트는 '높은 곳'이란 뜻으로 이방신의 신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Herodotos)에 의하면 이 탑에서 벨(바알) 숭배와 점성술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지금도 옛 바벨론 지역에 가면 지구라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요 반역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바벨탑을 쌓지 못하도록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창 11:7, 8). 이렇게 해서 세상에 수많은 언어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이 사건으로 인해 다양한 인종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시자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바벨탑을 비롯한 도시 건설을 중단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온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종의 구분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창 1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므롯은 세상에서 첫 영걸이요 용감한 사냥꾼으로 명성을 얻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실패한 인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부나 명성을 얻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며 또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니므롯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늘 행실에 조심하며 겸손하고 경건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